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갓 딴 포도의 신선함을 1초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착즙하고 싶은 것이었다. 새벽부터 포도 따느라 녹초가 되었을 텐데도 몹시 설레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수확한 시인의 포도가 어떤 액체가 될지 너무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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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꽃은 술이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명언이다. 농부가 비바람 뙤약볕에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한 톨의 쌀과 밀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경건함이 있다. 그러나 농업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태초, 인간이 배를 채운 뒤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하면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얼마나 설레고 즐거웠을까. 술은 그런 것이다. 생존이 아닌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이란 것도 그렇다. 둘 다 생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가외의 즐거움이다. 술을 빚거나 소설을 쓰는 행위는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인생에 꼭 필요하지 않은 쓸데없는 짓을 엄청 진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글도 있고 내 삶을 개척하고 인격을 함양시키거나 지적 수준을 높여주는 등의 실용적인 글들도 있지만 사실 문학의 순수한 존재가치는 나만의 조용한 기쁨을 위한 봉사자다. 침대맡에 앉아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며 밤새 인물들을 따라가는 것은 생존과 관계없다. 쓸데없이 즐거운 짓이다.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다.
“이 색깔 좀 봐. 로제 와인으로는 더없이 적합한 포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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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는 효모들에게 일을 맡겨야겠군.”
포도즙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각양각색의 효모들이 바글거리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포도에 붙어 있던 자연 그대로의 야생 효모들이었다. 이제부터 이놈들은 액체 속을 헤엄쳐 다니며 어떤 소설 속 인물보다 흥미롭게 자기 역할을 할 것이다. 아주 힘센 놈들이란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불을 땐 것처럼 포도즙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 모금 마셔볼까 그럼, 레돔이 발효 탱크에서 즙을 빼내 색깔을 보고 향을 맡았다. 포도즙이 와인으로 변해가는 순간, 악당 효모가 나타나면 와인을 모두 썩어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작가도 그들을 따라가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겨울 내내 우리는 효모들이 하는 짓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매일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