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국가의 안보에 해당하는 것이 기업으로 치면 경영권이다. 경영권이 흔들리는 기업은 안보가 불안한 국가와 다르지 않다. 경영권이 불안하면 기업은 투자와 고용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이즌필(poison pill)이라는 경영권 방어제도다. 포이즌필은 거대 투기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이 있을 경우 이사회가 기존 주주들에게 주식을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측의 부담을 늘려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제도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포이즌필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 기업들의 숙원이다. 이 제도는 2010년 국무회의를 통과하는 등 시행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국회에서 무산된 적이 있는데, 산업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지난달에도 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가 호소문을 냈다. 정부가 기업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둘째, 외국 투기자본의 공세로부터 경영권을 지켜줄 안전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해온 국민연금공단마저 기업의 내실 있는 발전보다는 단기적인 주주이익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이 예정대로 7월부터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면 엘리엇 같은 투기자본의 공세에 날개를 달아줄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 행동주의펀드 등과 ‘코드 맞추기’를 하겠다는 것이 스튜어드십코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을 포함해 290개에 이르는 국내 알짜 상장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 기업이 경영권 위협 공포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다.
선진국에서도 광범하게 활용되는 포이즌필은 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다. 삼키려는 물고기에게는 치명적이지만 그 밖의 다른 물고기에게는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독새우의 독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투기자본들이 가장 만만하게 보는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최소한의 방어용 독을 품을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