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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전승민]바닥에 떨어진 원자력 신뢰

입력 | 2018-05-17 03:00:00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핵은 양날의 칼이다. 쓰기에 따라 유용하고 깨끗한 에너지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더할 나위 없이 파괴적인 무기도 될 수 있다. 그러니 핵을 다루는 국가, 그리고 사람에게 신뢰란 필수다. 신뢰가 없다면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조차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신뢰는 어떨까. 아쉽지만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긴 어려워 보인다. 먼저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여러 번 무허가로 실험한 전례가 있다. 1982년엔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자력연)의 연구용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한 바 있고 2000년엔 3개월간 레이저로 농축우라늄을 만들기도 했다. 과학적 연구 목적에 소량을 농축해 봤다지만 협정 위반인 이 실험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고운 시선으로 볼 리 없었다. 결국 IAEA는 2004년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사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자력연은 2007년 이렇게 만들었던 농축우라늄을 포함해 무려 2.6kg의 우라늄을 심지어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당시 발표로는 ‘분실된 지 3개월이 지나 알게 됐고,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타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핵무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기술을 무허가로 실험했고, 그 결과로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시료를 내다버렸다니. 이 해명을 듣는 해외 전문가들은 과연 우리 연구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급기야 최근에는 귀를 의심할 만한 사건도 들린다. 원자력연 직원 중 일부가 낡은 실험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Ⅲ’의 해체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 중 돈이 될 만한 것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나왔다. 해체 과정 중 나온 전선이 재활용업체에 무단 반출되고 순금으로 제작된 수억 원대의 부품도 행방이 묘연하다. 더구나 트리가 마크-Ⅲ는 1982년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원자로다. 원자력연은 1월 방사성 폐기물 보관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며 심지어 이를 은폐하려 해 지탄받기도 했다.

우리는 과거 원자력 기술을 처음 이전해 준 미국과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있다. 이 때문에 발전용 핵연료를 국내에서 농축해 직접 만들지 못하고 전량 수입하고 있다. 2015년 재협상을 통해 일부 권한을 더 확보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포괄적인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계속해서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연구기관을 보며 미국과 IAEA는 과연 “한국은 신뢰할 만하니 앞으로 규제를 더 풀어주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몇 해 전 한 과학자가 ‘원자력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을 때가 있어 서글프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있다. 마땅히 과학자의 연구는 지원받아야 하며 그 인격은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폐기물을 빼돌리고, 방사성물질 창고의 화재를 은폐하고, 국가적 협약을 위반해 실험을 하는 일은 분명 질책과 징계의 대상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문책이 없다면 한국 원자력계의 신뢰는 점점 더 낮아질 것이다.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