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지도자 65년 만의 서방 데뷔전… 김정은 표현대로 ‘잘 연출’됐으나 연평도 포격도 서슴없이 말해 독재자, 괴물 아니라고 느낄 때 친밀감 느끼고 심지어 감동 6년 집권 ‘내공’ 어두운 면 봐야
박제균 논설실장
김정은의 판문점 군사분계선 월경(越境)은 3대를 통틀어 65년 만의 서방세계 데뷔전이었다. 자칫 한 나라의 지도자로선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에 그 정도면 자신의 표현대로 ‘잘 연출됐다’는 평가를 들을 만하다. 특히 문 대통령이 “나는 언제쯤 (군사분계선을)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 하자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하며 즉석에서 중립국감독위원회 경계선을 넘어서는 대목에선 뼛속까지 제왕(帝王) 교육을 받고 자란 권력자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사실 그 군사분계선이란 게 너비 50cm의 콘크리트 턱에 불과하지만 막상 그걸 넘으려면 심사가 복잡해진다. 1992년 봄에 내가 그랬다. 당시 판문점에선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에 따른 후속조치로 숱한 회담이 열렸다. 취재기자였던 나는 이번 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집에서 풀 기사를 썼다. 다른 남측 기자들은 회의가 열리는 북측 통일각으로 넘어간 뒤였다. 송고를 마친 뒤 혼자 통일각으로 걷다가 문제의 턱을 만난 것이다.
그 군사분계선을 김정은은 대수롭지 않게 넘나들었다. 민감한 언행도 서슴지 않으며 그걸로 되레 ‘매력 공세’를 펼쳤다. “문 대통령께서 우리 때문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느라 새벽잠을 많이 설쳤는데… 이제 설치지 않도록 내가 확인하겠다.”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에 대해 한국민과 문 대통령에게 사과를 해도 모자란 터에 말 한마디로 넘겼다.
더구나 그가 “실향민과 탈북자, 연평도 주민 등 언제 북한군의 포격이 날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분들도 오늘 우리 만남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봤다”고 말하는 데선 황당함마저 느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반쯤 북한군은 예고도 없이 연평도를 포격해 민간인 2명과 군인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 북한이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 대한민국의 영토를 공격해 민간인 사망자가 나온 사건이다. 북한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퉁치고 지나갈 일은 아니다. 정상회담에 배석한 북측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오만한 화법의 연원(淵源)이 어딘지 짐작하게 했다.
김정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그랬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오셔서 (내가) 은둔에서 해방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인 은둔을 농담 소재로 삼아 순간적으로 본말(本末)을 전도케 하는 말솜씨였다. 자신감 충만한 오너나 권력자가 아니라면 입 밖에도 내기 어려운 말투를 김정은은 선대(先代)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독재자가 괴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만으로 친밀감을 느끼고, 심지어 감동하기도 한다. 비단 김정은을 만나 악수한 뒤 “너무너무 영광”이라고 말한 걸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는 ‘특별한 기회’를 얻은 남측 인사들도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얘기했다. 그 특별한 기회가 주는 희소성이야말로 매력의 주(主)요소이기 때문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