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담지 않고 사과한 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사람들 많아 화해와 갈등의 종결은 제대로 사과할 때 비로소 시작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 겸 SF 소설가
한국어에는 여러 사과 표현이 있다.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볼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세 사과문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간단한 사과를 깔끔하게 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볼까. ‘어’, ‘앗’, ‘아이고’, ‘저런’은 사과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나 ‘아니 좀’이나 ‘어쩌다 보니’도 사과가 아니다. 완전한 문장이 아닐뿐더러 애당초 의미값이 거의 없다. ‘기분이 나빴다면’도 당연히 사과가 아니다. ‘제가 술에 많이 취해서’, ‘생각이 짧아서’도 사과가 아니다. 그 나이 먹도록 자기 주량을 모르고 사리 분별 못 하는 인간이라는 정보를 주는 표현일 뿐이다. ‘친딸 같아서 그랬다’, ‘가족 같아서 그랬다’, ‘친한 선후배 사이라 생각했다’도 사과가 아니다. 타인과의 거리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자인(自認)일 뿐이다. ‘사정이 어려웠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도 사과가 아니다. 여러모로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밝히는 표현일 뿐이다.
이런, 말하는 사람은 사과랍시고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과가 아닌 어정쩡하고 장황한 말들의 정체가 뭘까 싶던 차에 웅앵웅 초키포키라는 말이 등장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웅앵웅 초키포키다! 지금 저 사람들은 사과가 아니라 웅앵웅 초키포키 하고 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갈등이 끝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행위 당사자가 잘못을 담백하게 인정하는 것은 화해와 해결, 재발 방지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제대로 사과를 받지 못해 이 첫걸음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 위에 말이 쌓이고 사건이 쌓인들 갈등이 더 무거워질 뿐, 무엇이 해결되랴.
말이 많이 쌓이면 우리는 피로감을 느낀다. 특히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모든 말이 무겁고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사실 그 길고 장황한 말들의 정체가 고작 웅앵웅 초키포키였기 때문이다. 웅앵웅 초키포키를 백 번쯤 들으면 지겹다. 백 번까지 갈 것도 없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벌써 내가 읊어댄 웅앵웅 초키포키에 질렸을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웅앵웅 초키포키의 힘이다! 아직 현실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화제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도 아닌데 마치 많은 일이 일어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착시에 속지 말자. 웅앵웅 초키포키는 사과가 아니다. 그리고 화해와 종결은, 웅앵웅이 아닌 제대로 된 사과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 겸 SF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