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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조은아]여성들이여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자

입력 | 2018-04-06 03:00:00


영국 일간 가디언이 지난해 분석한 BBC방송의 20대 고액 연봉자. 이 중 여성은 4명뿐이다. ‘임금차별’ 비판을 받은 BBC는 이달 초 남녀 프로그램 출연자 비율을 반반으로 맞추겠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영국 가디언


조은아 국제부 기자

영국 에든버러대 및 옥스퍼드대 졸업. 중국의 대학들에서 영어 및 경제학 강의. 영국에서 음식점과 중소 영화 제작사 경영. BBC 입사 뒤 중국 특파원 부임….

영국의 여성 언론인 캐리 그레이시 전 BBC 중국 편집장(56)의 스펙이다. 어떤 남성 편집장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법하다. 그는 자녀 둘을 키우고 2012년 암 투병 중에도 일을 포기하지 않은 ‘열혈 기자’다. 그런 그가 올해 1월 돌연 편집장 자리를 내놨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남성 동료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레이시 전 편집장은 당시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항의하니 회사는 임금을 33%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난 거절했다. 여성을 차별하는 임금 구조를 알게 된 이상 편집장을 맡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그레이시 전 편집장의 결단은 영국의 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BBC 직원들은 물론이고 많은 시민들이 소셜미디어에 ‘#나는캐리를지지한다(#IStandWithCarrie)’란 슬로건을 걸고 운동을 키웠다. BBC의 남성 뉴스 진행자 4명은 임금을 자진 삭감하겠다고 나섰다. 정치권도 움직였다. 영국의 여성 하원의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임금 격차 해소를 요구하는 ‘페이 미투(#PayMeToo)’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집권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등에서 뜻을 모은 여성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뭉쳤다. 이들은 노동조합, 여성단체와 연대해 기업들에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요구하기로 했다. 영국 여성들은 ‘이 땅에서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임금 격차를 꼭 해소하자’고 다짐한다. ‘여자는 살림을 하고 남자는 직장에 나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빅토리아시대의 헛된 믿음이 여전히 존재하는 탓에 임금 격차가 생겨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믿음이 고액 연봉직으로 나가려는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얘기다.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듯이 ‘페이 미투’도 세계로 번질 조짐이다. 지난달 프랑스에선 2020년부터 남녀 임금 격차를 해소하지 않는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 월가도 들썩거리고 있다. 씨티그룹은 1월 15일 월가 대형은행 중 처음으로 성별, 인종별 임금격차를 공개하고 격차 해소에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매를 맞느니 먼저 움직이자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스타벅스는 지난달 직급이나 업무가 같으면 100% 같은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간 직원의 과거 급여 명세를 참고해 임금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직원들의 근무 현황을 분석해 임금을 산정할 예정이다. 주기적으로 비슷한 경력이나 직급에 속한 직원들의 임금을 비교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로 했다. 차량공유 기업 ‘리프트’도 지난달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임금에 대한 감사를 외부 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기업들이 솔선수범하는 이유는 어차피 주요 국가들에서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규제 조치들이 가동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 뉴저지주, 워싱턴주가 최근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이달부터 250인 이상의 근로자가 일하는 사업장이라면 성별, 인종별 임금 격차를 공개해야 한다.

‘페이 미투’의 파도에 고민이 많아진 경영자들을 위해 영국 BBC는 팁을 내놓기도 했다. 고연봉직에 여성들이 원활하게 진출하도록 육아휴직 제도나 유연근무제를 활성화하는 안이다. 고위직 일정 비율은 여성으로 유지하는 쿼터제를 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여성들도 변화를 이뤄낼 방법을 스스로 찾을 필요가 있다. 기업인들은 여성 직원들이 임금이나 처우를 요구하는 데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연봉을 ‘회사와의 협상 결과물’로 여기는 반면에 여성은 ‘주는 대로 받는 돈’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여성들이여, 금융기업 버진머니 영국법인의 제인앤 가디아 회장이 지난해 한 회의에서 남긴 말을 명심하자. “사측에서 연봉액을 제시하면 남성들은 ‘충분하지 않다’고 답하고, 여성들은 ‘고맙다’고 하더라.”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