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장례의 도(道)에 다소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의 십대제자, 즉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하나인 재아(宰我)가 부모의 3년상이 너무 긴 것 같으니 1년으로 줄이자고 제안하자, 불같이 화를 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질지 못한 자로구나. 자식은 모름지기 태어났을 때부터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 법이다. 3년상은 온 세상의 공통된 예법이거늘, 저도 부모한테서 3년 동안 사랑을 받았으면서 저렇게 말하다니!”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리가 있는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공자에 대한 더 강력한 도전은 그의 제자가 아닌 묵자에게서 나왔다. 공자가 세상을 떠날 무렵 태어나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묵자는 공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장례의 도를 “천하를 망치는 유가(儒家)의 네 가지 도(道)” 중 하나라며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는 절장(節葬), 즉 검소한 장례를 선호하고 시간도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가난한 사람들이 3년상을 치르려면 살림을 탕진할 것이다.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고 공인(工人)들은 “수레와 배를 수리하거나 그릇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천자(天子)나 제후들이 죽으면 수백 명 내지 수십 명, 장군이나 대부(大夫)가 죽으면 수십 명 내지 수 명”의 아랫사람들이 때로는 산 채로, 때로는 죽임을 당해 순장(殉葬)될 것이다. 아랫사람의 목숨도 윗사람의 것과 똑같은 사랑, 즉 겸애(兼愛)의 대상이거늘, 죽은 자를 위해 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처럼 묵자는 장례에서조차 권력자에게 휘둘려야 했던, 힘없는 약자들의 상처와 눈물을 먼저 생각했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공자가 강조한 과도한 장례는 효라기보다 ‘천하를 망치는’ 폭력에 가까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