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쳐도 부패와 협작 갈등만 풍성 사회구조의 발전은 절망적일만큼 느려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구조를 발전시켜야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도시로 나와 며칠분의 신문을 한꺼번에 펼쳐 볼 때, 거기서 느끼는 느낌도 유사하다. 도대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길은 없다. 그 대신 부패와 협잡, 갈등과 울부짖음은 풍성하다. 옳거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소식이려니 하며 포용하는 길밖에는 없다. 상황은 좀 변할지 몰라도, 문제와 통증은 동일하다.
이것이 사회구조에서 느끼는 허탈감이다. 좀처럼 변하지 않으며, 인간의 얼굴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대학 시절 사회현상을 ‘구조’로 볼 것인지 ‘개인’으로 볼 것인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구조에 대한 설명에 몸을 맡겼다. 그때 나를 설레게 했던 건 ‘구조’에 대한 어휘와 논변이었다. 전체는 부분의 단순총합 이상의 것이라는 언명에 젊은 청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신비감이 배어 있었다. 사회는 상호 작용하는 개인들이 모여 구성하는 듯 보이지만, 개별 행위자의 속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고 지배한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유혹이 특히 컸다. 가장 개인적 결단으로 보이는 인간의 자살을 사회적 응집력과 공동체성의 결과물로 보는 시각이 설명력과 정서적 호소력을 모두 갖고 있었다. 1980년대 미국 학자 시다 스카치폴이 중국의 혁명을 분석하며,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구조에 몸을 맡기는 데 일조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전략전술보다는 소작농의 비율 같은 구조가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일견, 사회구조를 주목했던 건 나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사회과학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안고 있는 특징 같은 것이기도 하다. ‘사회’를 과학하겠다고 나섬으로써 이미 연구의 단위로 구조를 선언한 것이니 태생적으로 구조가 이기는 게임 속에 내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사회구조의 발전은 절망적일 만큼 느리고, 인간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모든 대통령을 응징해도 부패는 그칠 줄을 모르며,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어도 운영은 그대로다. 사람 역시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아마 구조의 개혁이란 몇 세대가 바뀌어야 우리가 비로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얼굴 모습을 거기서 관찰하기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회구조 개혁을 위해 누구는 안토니오 그람시 같은 ‘진지전’을 제안하겠지만, 내 경험상 구조의 발전이 공전할 때 평범한 사람들에게 좋은 대안은 생활세계의 발전을 시도해 보는 일이다. 거대한 사회구조의 힘과 익명성에 절망하지 않고, 중범위 수준에서 가능한 발전을 꿈꾸고 노력해 보는 일이다. 공동체 운동과 마을 만들기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구조를 거기서 실험하고 발전시켜 볼 수도 있다.
봄이 와도 집 앞의 우체통에는 고지서와 청구서가 계속 날아들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 번식시킨 사과나무 묘목을 가져가라는 옆 동네 아저씨의 쪽지와 결혼식 날짜를 잡았으니 주례를 서달라는 제자의 편지 한 통으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을 끝내고 개학을 하는 첫날 이런 생각을 하며 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