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0호]‘세계인의 축제’ 올림픽과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심층보도를 통해 한국 선수를 응원하고 국민 의식을 고취했다. 1975년 4월 1일 창간 55주년 기념호에는 그동안의 동아 체육사를 재조명하는 전면기획을 내보냈다(왼쪽 사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엔 황영조가 마라톤을 제패하자 1면을 포함해 8개 면에 걸쳐 집중보도했다. 동아일보DB
그해 1월 3일, 동아일보는 ‘동계올림픽 정도기(征途記)’를 연재했다. 김정연 선수(1992년 작고)가 직접 쓴 칼럼이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정연은 필력이 좋았다. 그는 동아일보의 ‘임시 특파원’ 자격으로 올림픽을 생생하게 전했다.
칼럼은 3월 11일까지 17회 연재됐다. 마지막 칼럼에서 김정연은 “(5000m 경기에서) 가슴이 아프도록 뛰었고 최선을 다했다. 조금도 후회가 없다. 다만 외국 선수들과 어깨를 겨루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정연은 1만 m에서 18분 2초로 13위에 올랐다.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1∼13위가 모두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동양 선수로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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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3만 호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와 겨울 스포츠의 인연은 지속됐다. 4회 겨울올림픽이 열리기 13년 전인 1923년 1월 20일, 동아일보는 스케이트 대회를 개최했다. ‘대동강 빙상 운동대회’로, 우리 민족이 주최한 최초의 겨울 스포츠 대회였다. “청년들의 활기를 북돋우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장은 인산인해였다. 관중 수만 명의 박수 소리가 산천을 진동시켰다. 선수들은 320야드의 경기장을 짧게는 3바퀴, 길게는 30바퀴를 돌았다. 가장 긴 30바퀴 종목에서는 김인덕이 23분 30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일제의 압제에 억눌린 한국 민중에게 스포츠는 숨통을 틔워주는 산소 호흡기이자 저항의식을 살리는 불씨였다. 그 불씨는 제4회 겨울올림픽이 끝나고 6개월이 지난 후 큰 들불이 됐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동아일보는 10일자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전했다. 25일자에는 시상식 사진을 내보내면서 손기정의 가슴에 낙인처럼 찍힌 일장기를 지웠다. 망국의 한을 씻는 듯했지만 고초는 컸다. 동아일보는 27일부터 무기정간을 당했고, 일장기 말소의 주역인 이길용 기자는 투옥됐다.
광복 이후 동아일보는 다시 ‘잔치’를 열었다. 1946년 8월 손기정 마라톤 제패 10주년 기념식을 주최했다. 손기정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에게 주는 ‘승리의 투구’를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요청에 따라 투구의 본국 송환을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을 통해 일본의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전달하겠다(8월 17일)”고 보도했다. 이 투구는 1986년에야 손기정의 품에 안겼다. 길고 긴 반환 운동의 출발점에 동아일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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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처음 출전하는 올림픽이었지만 선수단 경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후원회가 꾸려졌다. 후원회는 1947년 12월, 올림픽 후원권이라는 이름의 국내 첫 복권을 발행했다.
복권 가격은 100원. 1등 당첨금은 100만 원이었다. 당시 금 한 돈이 5600원 정도였으니 당첨금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두 달 동안 복권 140여만 장이 팔렸다. 동아일보는 이 사업을 적극 후원하며 ‘한 장씩 더 사자’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올림픽에서 한국은 동메달 2개를 획득해 종합 32위를 기록했다.
1970년대에도 동아일보는 스포츠 행사를 꾸준히 이어갔다. 1975년 4월 1일에는 창간 55주년을 맞아 ‘동아체육사’를 종합한 특집 면을 제작했다. 1976년 8월 10일에는 ‘메달리스트의 밤’ 행사도 주최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매일 8개 면을 증면 발행했다. 추석 당일을 빼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신문을 제작했다. 광화문 사옥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레넌 루리의 ‘루리가 그리는 서울올림픽’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 만평은 동아일보에 최초 게재된 후 전 세계로 공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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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9월 26일 오후 이 사실을 단독 취재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이라 서울에 배달되는 신문에는 기사를 실을 수 없어 지방으로 배달되는 신문에 1보를 올렸다. 바로 다음 날 이 보도는 큰 파장을 불렀다. 세계적 특종이었다.
당시만 해도 냉전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동아일보는 올림픽을 통해 동서화합을 추구했다. 처음으로 소련의 문화예술계와 접촉해 볼쇼이발레단의 내한 공연을 이끌어냈다. 9월 3∼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은 매회 객석이 꽉 찼다. 문화계에서는 이 공연을 ‘광복 이후 최대의 문화적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올림픽 중계 정보를 담은 8개 면을 특별 발행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자 1면을 포함해 8개 면을 할애해 의미를 집중 보도했다.
체육계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연택 대한체육회 고문은 “올림픽은 물론 대한체육회가 출범할 때에도 동아일보 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역할이 컸다. 우리 스포츠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동아일보가 있었다. 앞으로도 동아일보가 이 역할을 이어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