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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의원 “동아가 준 최고의 영예… 지금도 曺국수로 불리는게 더 좋아”

입력 | 2018-01-18 03:00:00

[나와 동아일보]<15> 국수전 16번 우승, 프로 9단 조훈현 의원




지금도 대한민국 바둑기사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호칭은 ‘국수(國手)’로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국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대회 명칭도 그러했지만 1956년 창설된 동아일보의 ‘국수전(國手戰)’ 우승자가 명실상부한 ‘국수’로 인정받았다.

2015년 59기를 마지막으로 중단되기까지 ‘국수전’의 역사는 곧 한국 바둑의 역사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생긴 프로 바둑대회였고, 가장 길게 존속했다. 숱한 기사들이 국수전을 통해 배출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도 국수전에서 벌어졌다. 다른 기전과 달리 ‘국수전’은 한 번만 우승해도 계속 ‘국수’로 칭해주는 전통이 있다. 이 영예로운 대회에서 나는 총 16번(1976∼1986년은 연속 10연패) 우승했으니, 내 바둑 인생에서도 국수전은 가장 큰 의미였던 셈이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나는 ‘조 의원’보다 ‘조 국수’라 불리는 게 더 좋으니 말이다.

국수전 첫 우승 전까지 나는 ‘변두리 제왕’으로 불렸다. 지방 기전은 여러 번 우승했지만 서울의 큰 대회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수전에서 우승하자 주변에서는 “조훈현이 드디어 한강을 건넜다. 이제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1976년 20기 국수전 도전 제1국에서 맞붙은 조훈현 당시 6단(오른쪽)과 국수였던 하찬석 6단. 이후 조훈현은 1986년 29기까지 내리 ‘국수전 10연패’라는 불멸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를 두고 당시 바둑계에서는 “천상천하 유조독존(天上天下 唯曺獨尊), 다른 기사들에게는 슬픈 시대이자 백색의 계엄령이 선포된 혹독한 겨울이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동아일보DB

당시 동아일보가 쓴 ‘막 오른 조훈현의 시대’(1976년 10월 5일자 7면)란 기사를 보면 첫 우승이었을 뿐인데도 과분한 기대를 걸어줘 지금 생각해도 황송할 따름이다.

국수전은 동아일보와 고 조남철 선생님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 선생께서는 동아일보에서 받은 기보 원고료를 상금으로 보태기도 했다. 당시 ‘국수’란 이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68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김인 국수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린하이펑(林海峰) 9단이 국내에서 특별대국을 벌였는데, 당시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 앞에 커다란 기보판을 놓고 공개해설을 했다. 그런데 바둑 팬들이 그야말로 지금 걸그룹 팬 모이듯이 구름처럼 모인 것이다. TV가 없던 1957년 2기 국수전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라디오로 대국을 중계했다고 한다. KBS 라디오에서 “제1착은 17의 4, 제2착은 4의 3…” 이런 식으로 돌 위치를 좌표로 불러준 것이다. 그리고 이날 자 신문에 백지 기보를 게재했다. 독자들이 실제로 라디오를 들으면서 돌 위치를 기입해 대국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1993년 국수전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로 흐르는 네바강 위에 뜬 유람선에서 열린 것도 당시로선 화제였다. 해외에서, 그것도 선상에서 기전이 열린 것은 당시로서는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기사 출신으로 당시 독일에서 사업을 하던 이창세 4단(국수전 7, 8기 준우승자)이 해외 대국을 제안했는데, 마침 러시아에서 유람선 사업을 하던 중이라 동아일보와 잘 연결돼 열린 것으로 안다. 나와 이창호(당시 6단)가 대국을 했는데 아쉽게도 졌다.

20기 국수전 우승 상장. 조훈현 의원은 “술은 못 마셨지만 상금 거의 전부를 인사 겸 해서 술 사는 데 썼다”고 회고했다. 조훈현 의원 제공 

국수전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1960, 70년대에는 기보 게재 여부에 따라 발행 부수가 5만 부 이상 차이가 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이유가 지금의 일본 요미우리신문을 있게 만든 두 공신이 바둑과 프로야구 팀 자이언츠였기 때문이다.

1939∼56년 요미우리신문은 ‘살아있는 기성’이라고 불리는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일본 정상급 고수들의 10번기 대국 기보를 게재했는데, 하루에 한 수밖에 싣지 않았다. 당시 일본 바둑은 노벨문학상을 탄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관전기를 쓸 정도로 문향이 깊게 배어 있었다. 지금처럼 수순과 해설에 그친 기보가 아니었다. 최고의 바둑과 작품처럼 느껴지는 관전 기보, 이걸 하루에 한 수씩 봐야 했으니 독자들이 얼마나 신문이 나오는 것을 갈망했을까. 대국이 길면 몇 달씩 이런 상태였는데….

이 전통과 권위에 빛나는 대회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많은 기전이 있었지만 국수전만 한 위상을 가진 대회는 없었으니까…. 국수전을 부활시켜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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