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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東亞]무궁화 기사로 독립의식 일깨우고… 매년 묘목 나눠줘

입력 | 2018-01-02 03:00:00

<13> 나라꽃 무궁화 사랑




우리 민족의 꽃 무궁화를 자세히 소개한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 ‘금수강산의 표징―조선 국화(國花) 무궁화의 내력’. 동아일보DB

“무궁화는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무성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꾸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도 얼마나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습니까….(중략)”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금수강산의 표징―조선 국화(國花) 무궁화의 내력’이란 특집기사가 실렸다. 민족의 꽃인 무궁화의 유래와 특색을 자세하게 설명한 기사다. 다른 나라의 국화에 비교해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면서 은연중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북돋웠다.

사실 조선 왕실의 꽃은 오얏(자두)꽃 ‘이화(李花)’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것은 무궁화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이라고 강조했고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는 저서 ‘풍류한국’에서 “한국은 황실 이화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다”며 “무궁화는 평민의 꽃으로 한국의 민주적 전통을 보여준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무궁화를 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 1월 1일 신년호부터는 1면의 ‘동아일보’ 제호 바탕에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를 넣었다. 제호의 배경인 무궁화 도안은 1938년 2월 10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 삭제되기까지 8년여 동안 사용했다. 광복 후 중간(重刊)된 1945년 12월 1일자부터 다시 무궁화가 동아일보의 제호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언론 통제하에서도 무궁화에 관한 기사나 사진이 유난히 많았다. 1926년 8월 20일 “무궁화는 잘도 핀다”, 1931년 8월 26일 “날마다 새 꽃을 피우는 무궁화” 등 마치 무궁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목적인 것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궁화 사진을 게재한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무궁화를 선양하기 위해 창간 65주년을 맞은 1985년부터 매해 4월 초 청계천 옆 광장에서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행사는 일제강점기 무궁화가 수난을 당한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 창간 10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계속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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