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이날 매뉴얼은 기자 수십 명이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당최 수능 날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길이 없는, 그런 매뉴얼이었다. 질의가 1시간 넘게 계속됐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교육부는 급기야 반강제로 브리핑을 종료시켰다.
이날 교육부가 공개한 행동요령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건 수능 도중 지진 발생 시 대피부터 시험 중단까지 모든 대응을 ‘시험장 책임자(교장) 또는 시험실 감독관(교사)’의 판단에 따르도록 한 점이었다. 이들이 판단 근거로 삼을 만한 명확한 기준 제시조차 없이 시험을 강행할지, 시험을 중단했다 재개할지, 아니면 다 관두고 밖으로 대피할지 등 모든 결정을 교장, 교사에게 맡기고 있었다. ‘현장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존중하겠다’는 미명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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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피 비전문가인 교장이 현장 상황을 과소 또는 과잉 판단해 안전사고가 나거나 시험이 무효 처리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까. 수능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국가를 상대로 한 송사가 불거진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국가는 해당 책임자를 100% 보호해줄 것인가? 더군다나 이들은 모두 단 한 번도 매뉴얼 실전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매뉴얼 공개 직후 일선 교원들 사이에서는 “부담스럽다”는 호소가 터져 나왔다. 21일 교육부는 뒤늦게 ‘교장과 교사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교원들에겐 큰 위로가 안 되는 분위기다.
교육부의 이날 매뉴얼은 내용을 떠나 형식 그 자체도 문제였다. 매뉴얼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를 정리한 것이다. 쉽고, 명확하고, 직관적이며, 논리적이어야 함은 기본이다. 하지만 교육부 매뉴얼은 모호한 표현과 복잡한 문장이 A4용지 2장에 걸쳐 꽉 채워져 있는 탓에 한 번 읽어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숙지하기 어려웠다. 명쾌한 삽화와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된 일본의 매뉴얼이 떠오르면서 ‘이것이 바로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국격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매뉴얼 공개 후 비난에 가까운 질문이 쇄도하자 막판에 교육부는 기자들을 책망하듯 ‘수험생들을 위해 불안감을 조성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국민의 불안감은 지진이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똑똑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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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