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위싱턴 특파원
속고 속이는 걸 세상 이치로 보는 장사치는 남보다 의심이 많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편이다. 취임 6개월 만에 핵심 측근인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를 비롯해 비서실장, 대변인, 국가안보보좌관을 모조리 내쳤을 정도다.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도 의심해 왔다. 억지춘향으로 사드를 배치하며, 대북 인도적 지원을 결정한 게 싹을 틔웠다. 아시아 순방 직전 사드 추가 배치를 안 하기로 중국에 약속한 뒤 균형외교까지 선언한 건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문제는 현실성에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은 내 편을 확인하려는 심리에서 나온다. 그래서 “둘 다 좋아”라는 말은 집에서도 안 먹힌다. 지금은 ‘때를 기다리겠다’는 덩샤오핑의 시대도, ‘평화롭게 우뚝 서겠다’는 후진타오의 시대도 아니다. 태평양을 노리는 시진핑과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트럼프가 맞서는 패권 충돌의 시대다. ‘친중도 하고 친미도 하겠다’고 하면 중국이야 좋아하겠지만, 미국은 ‘거리를 두겠다’는 말로 들을 수밖에 없다.
외교라인의 역량도 따져봐야 한다. 고려가 10∼12세기 송, 요, 금 사이에서 화려하게 썸 타는 균형외교에 성공할 땐 서희 같은 외교관과 강감찬 같은 장수가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과거 운동권 이념에서 자유롭지 않은 세력과 ‘얼굴마담’ 평을 듣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있을 뿐이다. 안보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세다.
트럼프가 순방을 앞두고 야심 차게 꺼내든 ‘인도 태평양 전략’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곱씹을수록 한심하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지난달 18일 인도, 일본, 호주를 연결해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발표한 뒤 우리는 어떤 전략을 세우고 있었을까. “미국의 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 청와대, “우리 외교와 일맥상통한다”고 한 외교부의 상반된 반응은 미중이 충돌하는 지점에 마땅한 전략과 대책이 없다는 걸 보여준 촌극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아빠가 좋다고 할 테니, 너는 엄마가 좋다고 하라’는 역할 분담 놀이를 했다는 말인가.
트럼프의 의심은 확신이 되고 있다. 힘의 우열이 분명한 관계에서 의심은 보복을 낳는다. 1950년 ‘애치슨라인’으로 한국을 방어선에서 뺐던 미국이 인도 태평양 전략에서 빠지겠다는 우리와 지금 수준의 안보동맹을 유지하리란 보장은 없다. 과거와 달리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져 미국도 함부로 할 순 없다고 방심할 노릇이 아니다. 안보가 불안하면 모든 게 무너진다. 중국이 힘을 갖고도 우리를 속국 취급하지 못한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1953년 이후 64년간뿐이라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박정훈 위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