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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도서관]우리는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입력 | 2017-09-19 15:46:00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1990년대의 대표 작가로 떠오른 박상우 씨. 동아일보DB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 나가는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소리, 그리고 공허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오는 여음처럼 희미하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요.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박상우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박상우 씨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1990년 11월 발표됐다. 발트3국 등 독립을 요구하던 연방공화국들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15개 구성공화국 국호 모두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달이었다. 소련 붕괴의 시작이었다.

술자리에 모인 6명은 ‘우리’로 묶인 이들이다. 겉으로 단단한 듯 보이지만 실은 몇 달 전부터 균열의 기미가 있었다. 정치에 대해 ‘이제는’이라는 회의론, ‘그래도’라는 명분론으로 ‘우리’가 나뉘면서다. 폭설을 계기삼아 수개월 만에 만났지만 자리를 옮길 때마다 ‘우리’ 는 수가 줄어든다. 흩어져가는 ‘우리’의 모습은 1980년대를 상징하는 ‘연대’가 소련 해체와 함께 마감되고 1990년대로 나아가는 역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연히 만난 여성 화가에게 이끌려 작업실 ‘샤갈의 마을’로 옮겼을 때 남겨진 ‘우리’는 둘이다. 작가는 남겨진 ‘우리 둘’이 손을 맞잡는 장면으로 소설을 매듭지으면서 인간의 온기를 전한다. 작가는 이 소설로 90년대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 동아일보DB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김춘수 시인이 1969년 발표한 시 제목이기도 하다. 시와 소설로 잘 알려진 구절에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혹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고 이름 지은 카페가 한때 분주히 들어서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 혹은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자연스레 여겨지지만, 샤갈이 그린 그림은 ‘나와 마을’이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