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축구지도자 정의성씨 北 아이스하키 청소년 대표 출신… 한국 온 뒤 축구 통해 사회 적응 탈북 아이들 위해 지역팀 만들어 “함께 공 차면 남북의 벽 사라져”
북한말이나 중국말을 쓰는 탈북 아이들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끼리끼리 어울리다 점점 소외되어 갔다. 이런 탈북 아이들을 남한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축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한 것이다. 서울 양천구 안양천공원 축구장에서 7∼12세 탈북 가정 및 남한 아이들에게 축구를 지도하고 있다.
“축구라는 게 참 묘했다. ‘남과 북’의 벽을 없앤다. 몸으로 부대끼면 가까워지고 편하게 지내게 된다. 서먹서먹해하던 탈북 가정 아이들도 축구를 통해 남한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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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지(延吉)의 한 담배공장 소속 축구 선수로 지역리그(한국의 실업축구 수준)에서 4년여 활약했다. 북한에는 실내링크가 평양에 단 1곳만 있다. 아이스하키를 할 수 있는 강의 얼음이 녹으면 아이스하키 훈련을 그만두고 축구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그래서 평양 이외 지역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축구 선수’로 불릴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무렵 폭력 사건에 연루돼 1개월 감옥살이를 하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2003년 2월 4일 한국에 들어왔고 하나원을 나온 뒤 금강산축구단을 만들어 한국 조기축구팀과 경기를 하러 돌아다녔다.
기술과 학벌이 없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축구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었다. 정부 보조금에 기대어 공 차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공을 차며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하게 됐다. 공을 함께 차는 사람들이 “북에서 왔다고? 축구 잘하네?” 하며 친근감을 표시해 왔고 회식도 함께하며 ‘형 동생’처럼 지냈다. 사업하는 지인들을 통해 취업도 했다. 그때 축구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2008년 무작정 ‘축구의 나라’ 잉글랜드 맨체스터로 떠났다. 뭐든 공부하고 싶었다. 6부 리그인 볼턴 FC에서 공을 찼다. 6부 리그지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을 배웠다. 2010년 귀국해 서울 강서6복지관과 협력해 ‘남북통합 강서하나 리틀 FC’를 만들었다. 잉글랜드에서와 같이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공을 차도록 했다. 탈북 아이들도 남한 출신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언어 차이도 극복하고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올해 초 축구로하나되는협회를 만들고 하나드림 FC를 창단했다. 탈북자들이 많이 사는 양천구 100여 탈북 가정 아버지와 아이들, 그리고 인근 한국 가정 아버지와 아이들이 대상이다. 아버지들은 주 1회, 아이들은 주 2회 함께 공을 차며 어울린다. 아이들은 장기적으로 주 5회로 늘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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