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 여행후 ‘손주병’ 호소 늘어
자녀 부부와 괌으로 3박 4일 일정의 휴가를 다녀온 노모 씨(69·여)는 귀국 다음 날인 4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가정문제상담소를 찾았다. 노 씨는 “친구들은 사위가 해외여행에 모시고 간다며 ‘팔자 좋다’고 했지만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한숨을 쉬었다. “손주 돌보느라 고생하신다”는 사위의 말에 들뜬 마음으로 휴가 길에 올랐지만 양육 장소가 외국 호텔방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노 씨는 “온종일 손주 돌보는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 휴가지 ‘독박’ 육아에 ‘손주병’까지
지난달 아들 부부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大阪)를 다녀온 한모 씨(65·여)는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세 살배기 손녀 때문에 여행 내내 허리통증에 시달렸다. 낯선 환경에 불안해한 손녀가 할머니에게만 안기려 한 것이다. 한 씨는 “손녀가 다리 아프다고 칭얼댈 때마다 아들이 ‘엄마, 빨리요(안아 주세요)’ 하는데 무척 얄미웠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이모 씨(66·여)는 아들 부부와 함께한 사이판 여행 3박 4일 중 이틀 동안 호텔에서 4세 손자와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아들 부부가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 버린 탓이다. 이 씨는 “텅 빈 호텔방에서 손자를 재우다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의 김모 씨(67·여)는 귀국길 공항 면세점에서 딸 부부로부터 명품 가방을 선물받았다. 김 씨는 “여행 가서 자기 자식 돌보느라 고생만 시켜 미안했는지 선물을 챙겨주긴 했지만 정작 필요한 건 하루 이틀이라도 푹 쉴 수 있는 여유”라고 말했다.
○ 자녀 부부싸움 할까 휴가 때도 ‘헌신’
특히 외가에서 주로 손주를 양육하는 경우 친가 쪽 조부모들은 부채의식과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독박 육아’를 각오하고 휴가에 함께한다. 아들 부부와 필리핀 세부 여행을 다녀온 박모 씨(66·여)는 “아들이 ‘평소 처가에서 애 봐준다고 고생이 많은데 우리도 성의 표시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직장 다니는 집사람이 쉴 수 있게 휴가지 가서 아이 좀 봐 달라’고 사정하더라”고 말했다. 외조부모들은 딸이 휴가 때라도 편히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따라 나선다.
김 소장은 “조부모가 낯선 여행지에서 특정 장소에만 머물며 육아를 도맡으면 소외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며 “자녀 부부와 함께 휴가를 갈 경우 양육 분담을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