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플래그십 스토어의 진화
플래그십(flagship)은 함대의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기함을 뜻하는 용어다. 유통에서 플래그십 스토어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정체성을 쏟은 일종의 체험 매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백화점 위주의 쇼핑문화에 한계를 느낀 주요 브랜드는 일찍이 플래그십 스토어에 투자해왔다.
브랜드의 스토리와 역사를 담은 제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지상 목표인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보다 특별할 수밖에 없다. 부지 선정부터 건축가, 설계, 층 구성까지 디테일 하나하나에 브랜드의 전략과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각 브랜드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집’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브랜드마다 집을 뜻하는 프랑스어 메종(maison) 혹은 영어 하우스(house)를 붙인다. 브랜드의 집, 다시 말해 브랜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점포가 들어선 지역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는 건축비만 50억∼100억 원 이상 투자한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본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느라 공사 기간도 일반 건물보다 두세 배 길어질 수 있다. 그만큼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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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거리의 부상
갤러리아 명품관에서 청담사거리까지의 약 800m를 가리켜 청담동 명품거리라 한다. 갤러리아 명품관이 등장한 것은 1990년. 당시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색다른 무리, ‘오렌지족’이 압구정동에 등장하면서 한화그룹은 이곳에 수입 브랜드를 모은 백화점을 만들기로 하고, 명품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명품이란 단어가 고급 패션 브랜드를 통칭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1990년대 말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이른바 3대 명품이 이 백화점에 모두 들어가면서 서울 압구정동 일대는 명실상부한 명품의 집산지로 불렸다.
한국의 명품 소비층이 늘면서 브랜드들은 백화점 밖으로 눈을 돌렸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커졌다. 선진 유통에 밝은 이명희 신세계 명예회장이 청담동 일대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후반 즈음이다. 최초의 청담동 명품거리의 명품 브랜드 점포는 1997년 문을 연 프라다로 알려져 있다. 2000년 루이뷔통이 이 거리에 존재감을 드러낸 뒤 청담동은 본격적인 ‘명품 시대’를 열었다.
2010년 이후 서울이 아시아 패션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는 또 한 번 진화를 거쳤다. 2015년 버버리와 디올, 2016년 MCM, 겐조, 미우미우가 문을 열었다. 까르띠에와 오메가도 새 단장했다. 내년에는 샤넬의 국내 최초 플래그십 스토어가 개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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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건축물의 각축전
크리스챤 디올의 ‘하우스 오브 디올’. 포토그래퍼 신경섭
포르장파르가 설계한 뉴욕의 LVMH 타워는 지역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정의한 건물로 꼽힌다. 서울의 하우스 오브 디올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의 볼륨감은 파리 몽테뉴가 30번지 디올 오트 쿠튀 아틀리에에서 만든 캔버스 천의 소재, 실루엣,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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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의 ‘까르띠에 메종 청담’. 까르띠에 제공
시릴 비녜옹 까르띠에 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CEO)는 개장 당시 “우리는 메종(플래그십 스토어)과 맨션(파리, 런던, 뉴욕 세 곳의 역사적인 매장) 등 큰 규모의 단독 부티크가 까르띠에의 정신과 해당 국가의 개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장려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까르띠에 메종 청담은 실내 장식과 건축적 면모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외관의 직선무늬는 한옥의 문살에서 영감을 받았고, 1층 입구에는 기와지붕을 떠올리게 하는 디딤돌이 있다.
영국 패션하우스 버버리의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외관의 버버리 체크문양 파사드가 눈에 띈다. 버버리코리아 제공
2015년 10월 첫선을 보인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은 그리스토퍼 베일리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CCO)의 감독하에 디자인된 11층 건물이다. 어둠이 몰리면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외관의 버버리 체크 문양 파사드가 빛이 난다.
버버리의 DK88백 컬렉션이 전시된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버버리 코리아 제공
특별한 서비스, 문화를 느끼다
오메가의 ‘오메가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오메가 코리아 제공
까르띠에 메종 청담의 1층 가든. 까르띠에 제공
특별한 카페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하우스 오브 디올의 루프톱에는 달콤한 마카롱으로 유명한 파티시에 피에르 에르메의 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조용한 서울의 트렌디한 거리에서 즐기는 마카롱, 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일품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김윤하 작가의 ‘그 우발에 대한, 방치하고 싶은 그 불편에 대한, 그럼에도 의도할 수 없는 그 오염된 수단에 대한, 그 전생을 수행하려고 증식하다가, 경계를 발견하고는’이라는 긴 이름의 작품. 사진 남기용ⓒ에르메스 재단 제공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