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광을 단장해 테마파크로 성공한 ‘광명동굴’의 비결
양기대 광명시장
광명시 남부 가학산 중턱에 있는 이 동굴은 사실 천연동굴은 아니다. 일제 때부터 1970년대 초까지 운영된 수도권 최대의 금속 광산이었다. 홍수 피해로 광산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후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뿐이다. 2015년 동굴 테마파크로 재단장돼 문을 열자마자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제2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정도다. 2016년 방문객은 142만 명으로 캐리비안베이(142만 명), 한국민속촌(149만 명) 등에 뒤지지 않는다. DBR 226호(2017년 6월 1일자)에 실린 광명동굴 사례 연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폐광? 동굴! 이름부터 새 출발
벽과 바닥에 황금칠을 한 황금의 길(위)과 암벽의 질감 및 레이저 영상을 이용한 ‘미디어파사드’ 쇼. 광명시 제공
광명동굴의 옛 이름은 시흥광산이다.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시흥 동(銅) 광산’이 설립됐다는 기록이 있으니 100세가 넘었다. 굴의 길이는 총 7.8km, 지하 8층 규모다. 보통 광산이라 하면 풀풀 날리는 검은 석탄재와 비좁은 통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토사가 연상된다. 하지만 광명동굴은 입자가 무른 석탄이 아니라 단단한 금속을 캐던 곳이다. 단단한 암반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침목 없이도 안전하고, 석탄재나 먼지도 날리지 않아 쾌적하다. 그러나 광산이 문을 닫은 이후 대부분은 지하수에 잠겼고, 상층부 일부만이 새우젓 저장창고로 쓰였다.
버려진 광산은 1990년대 후반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강원랜드 개장 등 전국적으로 폐광 지역 개발이 이슈가 되던 때다. 광명시 측은 광산 테마파크, 워터파크, 실내 스키장 등을 포함해 약 500억 원의 투자금이 들어가는 대형 민관합작 개발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예산과 사업성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2010년 민선 5기 양기대 시장이 부임해 사업을 밀어붙였다. 양 시장은 “당시 KTX 광명 역사가 열차 종착역에서 중간역으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지역 개발에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광명동굴이 딱 거기에 필요한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양 시장은 진두지휘를 맡고 땅의 매입부터 진행했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민간 투자 파트너를 기다리느니 우선 적은 돈이라도 들여 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한 것이다. 시장 부임 반 년 만에 43억 원의 예산을 들여 폐광을 매입했다. 그런 다음 이름을 바꿨다. 양 시장은 ‘시흥광산’ 혹은 ‘가학광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광명동굴’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광산보다는 동굴이라는 이름이 친근감을 주고, 또 광명이라는 지명을 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흔히 지자체들이 만드는 관광자원들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명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곤 한다. 별 의미 없는 외국어나 어색한 신조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양 시장은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택했다.
8개월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2011년 8월 처음 동굴이 일반에 공개됐다. 하루 두 번,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헬멧을 쓰고 탐방하는 형태였다. 아직 별다른 볼거리는 없었지만 1년 내내 섭씨 12도 정도로 유지되는 갱도 안이 워낙 시원해 방문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입소문만으로 그해 말까지 1만6000여 명이 찾았다.
좋은 반응에 고무된 광명시는 이듬해 아예 동굴 개발을 전담하는 테마관광과를 신설하고 동굴 앞에 사무실을 설치했다. 다른 일엔 신경 쓰지 말고 동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데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1999년 처음 폐광을 탐사할 때 앞장섰던 최봉석 팀장(현 시민행복국장)이 리더를 맡았다.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일반적인 공무원 조직처럼 천천히 뜸을 들이며 완벽을 기하기보다는, 빨리 시도하고 빨리 실패하고 빨리 고쳐나가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방식으로 일했다. 린 스타트업은 어설픈 제품이라도 시장에 먼저 출시해서 고객들의 반응을 봐가며 수정 보완하는 전략을 뜻한다.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국내외 관광지의 벤치마킹부터 시작했다. 특히 미국 텍사스 캘리코 광산, 폴란드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대만 진과스 황금박물관 등 해외의 유명 동굴 테마파크를 돌아다니며 장점을 하나씩 배워왔다. 동굴 안의 넓은 공간을 공연장으로 꾸미고 천연 지하수로 수족관을 만들었다. 광산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관도 들여놓았다. 귀신의 집과 ‘황금길’도 설치했다.
“사람들이 처음엔 ‘동굴에 기껏해야 종유석이나 있겠지’ 하고 방문하지만 실제로 와서는 곳곳에 꾸며 놓은 다양한 콘텐츠들을 보고 그중에서 각자 자기가 공감하는 바를 찾는 것 같다”는 게 최 국장이 보는 광명동굴의 인기 비결이다.
때로는 어떤 전시품이 좋은 반응을 얻었더라도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과감하게 뜯어고쳤다. 일례로 개장 초기 동굴 내 공연장인 ‘예술의 전당’에는 객석이 설치되고 음악회가 열렸지만, 관람객 수가 늘어나 혼잡해지자 간편하게 서서 관람할 수 있는 레이저쇼로 전환했다. 이미 투자된 돈, 즉 매몰비용을 아까워하고 책임을 묻기보다는 미래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어차피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경험도 없었다.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산도 풍족하지 않았다. 돈을 조금씩 써가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회의를 통해 계획을 수정하는 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양 시장은 말한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