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계 리얼리즘의 선구자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은 “놀고 즐기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 본성인데, 한국 사회는 이런 희로애락을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슬 퍼런 시기, 심의·검열기관에서 주는 상을 거부한 만화가가 있다. ‘골목대장 악동이’ ‘삼국지’ 등 작품으로 유명한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65)이다. 7월 9일까지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빼앗긴 창작의 자유’전을 여는 그를 18일 만났다.
그는 1988년 ‘골목대장 악동이’로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주는 ‘한국만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만화의 심의·검열을 관장하는 기구에서 준 상을 어떻게 받느나”며 거부했다. 당시 함께 수상자 명단에 오른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작가와 ‘질 수 없다’의 허영만 작가도 거부 대열에 동참했다. 이 이사장은 “나를 순치(馴致)시키려 상을 주는 것 같아 영광스럽지 않았다. (수상 사실이) 평생 흉터로 남을 듯해 이틀 고민하다 상을 반납했다”고 했다.
‘리얼리스트’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종종 심의·검열의 대상이 됐다. 벌거벗은 갓난아이를 그렸다는 이유로 검열당해 기저귀를 그려 넣은 ‘거미줄’의 한 장면(첫번째 그림)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삼아 수차례 심의에 걸린 ‘억새’(두번째 그림).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공
민주정부하에서도 만화는 여전히 사회악으로 간주됐다.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기소 사건이 대표적이다. 1997년 미성년자보호법이 개정되고 ‘불량만화 처벌’ 조항이 생겨났다. 검찰은 “강간, 윤간, 수간 등 비윤리적인 성교 장면이 너무 많고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와 과도한 폭력성 등의 문제가 있다”며 이 작가를 기소했다.
“야만적이지 않은 신화가 있나요? 그리스, 중국, 일본 신화에도 이런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문명이 정착되지 않은 야만의 시대였기에 야만적으로 그린 건데 그걸 걸고넘어진 거죠.” 6년을 끌어온 긴 소송은 2002년 법 조항이 위헌 판결됨에 따라 이 씨의 무죄로 마무리된다.
40년을 만화가로 살던 그는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동료, 선후배 작가들의 창작 환경을 지원하는 위치가 됐다. 평생을 표현·창작의 자유 확대를 위해 살아왔다는 그는 “자유 확장에 걸림돌이 있다면 하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동료이자 식구”라고 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