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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성의 오늘과 내일]“부작위는 처벌받지 않는다”

입력 | 2017-05-24 03:00:00


황재성 경제부장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는 시원한 사이다 맛이다. 새 정부의 출범 후 보여준 여러 가지 파격적인 행보와 조치들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이다. 실제로 총리, 부총리 후보자 명단을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뒤 취재진에게 “질문할 게 없느냐”고 묻거나 비서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청와대 경내를 하얀 셔츠 차림으로 거니는 모습은 신선했다.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자 인정이나 관료 사회의 순혈주의 타파를 위한 비고시 출신 발탁 인사 등과 같은 조치 역시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라는 반응과 함께 보수, 진보 진영 양측 모두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 8, 9년간 집권 준비를 제대로 한 것 같다”는 상찬이 쏟아졌고 기자도 그런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22일 정부의 4대강에 대한 정책 감사 지시 발표는 듣는 내내 “도대체 왜 지금”이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더군다나 청와대는 발표 말미에 “개인의 위법·탈법 행위 적발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감사 과정에서 명백한 불법 행위나 비리가 나타날 경우 상응하는 방식으로 후속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 감사원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언급이다.

새 정부 출범 후 4대강 사업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검증 작업이 이뤄지리란 예상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일부 시민단체들이 4대강에 대해 줄기차게 뿌리 깊은 반감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정부 초기 해결해야 할 산적한 경제 사회 안보 문제들을 제쳐두고 4대강 사업을 최우선 개혁과제로 꺼내든 건 이해하기 어렵다. 4대강 사업은 보수, 진보의 진영 논리를 떠나서 찬반이 엇갈릴뿐더러 사업 효과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아서다. 또 4대강 사업에 대한 재조사의 근거로 제시되는 환경 훼손이나 경제성 논란 등도 찬반의 입장 차가 분명하다.

게다가 이전 2개 정부에서 감사원-공정거래위원회-검찰-경찰 등 사정기관 대부분을 동원해 각종 감사와 조사, 수사 등을 해왔다는 점도 고려해 봐야 한다. 한 대형 건설사 간부는 “이명박 정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박근혜 정부 때엔 사정기관 몇 곳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자료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기관이 다 가져갔으니 그쪽에서 자료 협조를 받으라는 말까지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시쳇말로 탈탈 털렸다는 뜻이다. 새 정부가 또다시 들춰서 새로운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런 와중에 역점 국책사업이라는 정부의 요구에 마지못해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련 업체들의 항변은 묻힌 지 오래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이런 조치들이 공직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정권이 바뀌고,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책임 추궁의 화살은 당시 행정책임을 맡았던 공직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 감사 내용을 소개하면서 당시 책임자로 일했던 공직자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처벌 운운하는 언론이 적잖다. 이 같은 마녀사냥의 결과가 ‘변양호 신드롬’을 낳았고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야기했다. 정부의 4대강 정책 감사 발표가 있은 뒤 만난 전직 고위 관료는 “한국 사회에서 공직자로 살아남기 위해 명심해야 할 금언 중 하나가 ‘부작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다. 이래서는 공직사회가 창의성을 가지고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문제나 국내 경제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파괴적인 혁신을 요구하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 감사가 ‘김빠진 사이다’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황재성 경제부장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