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정 ‘프로농구 20년’ 마감하던 날
18일 서울 한국농구연맹(KBL)센터에서 은퇴식을 가진 주희정(40)은 아들과 나란히 앉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적었다”며 자필 원고를 펼쳤다. 하지만 원고를 보면서도 그는 “마음을 표현할 알맞은 단어가 도무지 없다”고 했다. “농구에 미쳐 지금까지 살아온 저에게 농구를 대체할 무엇인가가 현재로서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 원 없이 뛴 스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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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사상 첫 ‘10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남기고 떠나는 주희정은 지난날을 찬찬히 곱씹었다.
“이제는 모두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늘 부족한 점을 메우고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하며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선수로서의 주희정은 이제 막을 내리고 물러납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대로….” 차오른 눈물에 주희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은 플래시 세례를 받는 아빠를 그저 신기한 듯 빤히 쳐다봤다.
그는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다. 늘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기에. 프로 초창기 ‘슛 없는 반쪽 선수’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그는 스스로도 “정말 무식하게 연습했다”고 할 만큼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를 만났던 감독들도 그 지독함이 주희정을 레전드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입을 모은다.
“주희정은 무식하게 연습한 게 아니다. 스스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잘 알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노력해서 만들어 냈다.”(KT&G 시절 은사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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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과 시작
하나는 아이들과의 약속이다. “정규리그 끝나고 첫째, 둘째 딸 아이랑 약속을 한 게 있어요. 애들이 1년만 더 선수 생활 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꼭 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하게 돼 마음이 좀 무겁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늘 품고 있는 할머니를 향한 마음의 빚이다. “할머니는 그 어려운 와중에도 손자 하나 잘 키우기 위해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는데 저는 해드린 게 하나도 없어요. 경기 때도 늘 할머니한테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그것도 이제 와 보니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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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아이들 학교, 학원 바래다주고 놀이터도 가면서 평범한 아빠처럼 지낼 것 같아요. 사실 아들이 농구를 많이 좋아해서 아들하고 농구도 재밌게 즐기려고 합니다. 농구 선수 하고 싶다고 조르고 있어요. 저는 극구 반대를 하고 있지만. 아들한테 초등학교 5학년이 돼도 꿈이 변하지 않으면 키워주겠다고 했습니다(웃음).”
주희정의 은퇴식은 옆을 지킨 아들 지우 군(7)의 말로 마무리됐다. “제 꿈은 농구 선수입니다. NBA(미국프로농구)에서 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치열했던 여정이 끝나는 순간 아들의 작은 꿈은 시작되고 있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