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작가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고, 염상섭은 한자를 달리하여 본명은 ‘尙燮’, 필명은 ‘想涉’이다. 이원록의 필명 이육사는 대구형무소 수인 번호 264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었지만, 사촌형인 한학자 이종형이 조언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원록이 ‘(그릇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의 육사(戮史)라는 필명에 대해 의견을 묻자, 이종형이 중국에서는 육(陸)자가 육(戮)과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며 육사(陸史)를 권했다는 것.
고은태와 고은, 신응식과 신경림, 황재우와 황지우, 김영준과 유하. 시인들의 본명과 필명이다. 이열과 이문열, 황수영과 황석영, 박금이와 박경리, 홍종현과 정이현. 소설가들의 본명과 필명이다. 평론가들도 정명교와 정과리, 전형준과 성민엽, 염홍경과 염무웅, 임양묵과 임우기 등이 있다. 방송사를 방문할 때 주민증을 맡겨야 하는 경우, 제작진이 등록해 놓은 작가 필명과 주민증의 이름이 달라 확인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1975년)을 발표하여,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주는 프랑스 최고 권위 공쿠르상을 ‘하늘의 뿌리’(1956년)에 이어 두 번 받았다. 같은 인물이라는 건 그가 죽고 1년 뒤에야 밝혀졌다. 일본 추리작가 에도가와 란포(본명 히라이 다로)의 필명에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존경이 담겼다.
작가들이 필명을 쓰게 된 사연은 다양하다. 본명이 너무 평범하다는 이유, 선배 작가가 필명을 지어준 경우, 작가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로 등단할 때부터 필명을 쓴 경우, 문학적 지향점을 필명에 담으려는 동기 등등.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필명은 ‘나는 작가다’라는 자기선언이자 문학적 창조성에 대한 간절한 희구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