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무용수들이 아리랑 공연에서 인공기와 오성홍기를 들고 북·중 친선을 강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또 트럼프 대통령은 “10분간 시 주석의 설명을 들은 후 북한 문제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엄청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시 주석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의 발언을 특유의 화법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쿼츠’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놀라운 무지를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쿼츠는 또 ‘시 주석은 이러한 생각을 어디서 갖게 됐을까. 자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 국수주의자의 의견을 여과 없이 옮긴 트럼프 대통령의 처사는 경솔했다’며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 외국 지도자보다 국무부의 한반도 전문가로부터 역사 교육을 받는 편이 현명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역사를 몰랐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시 주석이 실제로 이런 발언을 했을 경우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주변국에 대해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정례브리핑 기록에서도 이와 관련된 질의응답 내용을 모두 삭제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한국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민감한 역사 문제까지 더해질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문제는 한국 국민을 자극해 심각한 반중(反中) 감정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영문 자매지인 ‘글로벌타임스’는 4월 21일자 사평(社評)에서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몇 마디 말로 중국과 외교적 충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글로벌타임스는 또 ‘한국 언론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이번 논란이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설명했을 개연성이 높다. 중국 외교부가 밝힌 이번 논란과 관련한 입장에서 미국 또는 트럼프 대통령을 거론하거나 책임을 미국 측에 돌리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 주석의 발언은 중국 정부의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은 항상 ‘중화(中華·Middle Kingdom)주의’를 자랑스럽게 내세워왔다. 중화주의는 화이(華夷)사상에서 비롯됐다. 중원 대륙의 왕조는 문명국이고 주변국은 미개한 이적(夷狄)의 나라라는 것이다.
중국 역사 교과서가 역대 왕조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조선, 류큐(琉球),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지방정권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식민지처럼 기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조공·책봉 관계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국제관계의 틀이라고 볼 수 있다. 주변국은 중국 역대 왕조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이었다.
4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오른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 사이트]
21세기 중화제국의 부활미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이 된 중국은 그동안 아시아·태평양 질서를 ‘21세기판 조공·책봉체제’로 만들려는 의도를 보여왔다. 중국은 이를 위해 이른바 삼동심원(三同心圓) 전략을 추진해왔다. 첫 번째 전략은 대만, 홍콩, 마카오 등 아편전쟁으로 빼앗겼던 자국 영토를 회복하고, 독립을 선언했던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를 자국 영토에 완전 통합하는 것이다. 중국은 홍콩과 마카오 주권을 이미 영국과 포르투갈로부터 각각 넘겨받았다. 또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는 현재 중국 영토인 신장웨이우얼과 시짱 자치구가 됐다.
두 번째 전략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 파키스탄, 미얀마 등을 자국에 종속하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경우 중국은 매년 상당한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해주는 등 전천후 동맹관계를 맺었다. 미얀마도 군사정권 통치 시절 중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중국은 북한과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의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번째 전략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주변 60여 개국과 경제권을 구축하는 것이다. 일대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뻗는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이고, 일로는 남중국해와 동남아를 거쳐 인도양과 중동,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21세기 해양 실크로드를 말한다. 시 주석은 이런 전략을 ‘중국몽(中國夢)’이라고 포장해왔다. 중국몽은 21세기 중화제국의 부활을 의미한다.
중국 정부는 이런 전략을 추진하면서 역사 왜곡이나 조작도 서슴없이 해왔다. 대표적 사례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 문제 등과 관련된 주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다. 특히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라고 왜곡해왔다.
중국이 현재 가장 우려하는 점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체제가 붕괴하는 것이다. ‘런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가 4월 22일자 사평에서 한미 군대가 지상에서 38선을 넘어 북한을 침략해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 한다면 중국이 즉시 군사적 개입에 나서겠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처지에선 자국에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종속된 북한을 빼앗길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시 주석의 왜곡된 역사관에는 이처럼 무서운 함의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