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 신문명을 꿈꾸고 일본에 건너간 천재시인 李箱 그의 눈에 비친 도쿄는 허영에 빠진 비속의 도시 거동수상자로 몰려 끝내 도쿄에서 숨지고 왜 그렇게 삶을 마감했는지 그의 80주기 맞아 우리가 풀어야 할 문학적 과제
권영민 문학평론가 美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를 쓰고 소설 ‘날개’를 발표한 후 도쿄로의 탈출을 꿈꾸었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현해탄(대한해협)의 높은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새로운 문명이 하나의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가 문단의 ‘춘원(春園) 시대’를 열게 된 곳도 도쿄였고, 임화가 무산계급에게 국가가 없다는 신념을 키웠던 곳도 도쿄였다.
이상은 1936년 늦가을 도쿄로 건너갔고 반년 정도 거기서 머물렀다. 그가 도쿄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도쿄에서의 그의 죽음 또한 그 문학의 마지막 장면을 정리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의문점들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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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제국의 수도 도쿄가 자신이 꿈꾸었던 현대정신의 중심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서구 문명의 세계를 치사하게도 흉내 내고 있던 도쿄의 ‘모조(模造)된 현대’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해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도회의 산책자가 되어 도쿄의 번화가를 거닐면서, 화려한 긴자(銀座)의 거리를 두고 ‘한 개의 그냥 허영 독본(虛榮讀本)’이라고 적었고, ‘낮의 긴자’는 ‘밤의 긴자의 해골’이라서 너무 추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대와 세기말의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도쿄라는 대도시에 대해 비아냥대었다. 하나의 거울에 또 다른 하나의 거울을 비춰 보듯이 이상이 발견한 이 도쿄의 이미지는 문명의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어슴푸레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상은 새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귀국할 수 없었다. 그는 일본 고등계 형사의 취체(取締)에 걸려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된 그는 도쿄의 늦겨울 한 달을 차디찬 경찰서 유치장에서 견뎌야 했다. 이 불행한 영혼은 그 육신과 함께 거기서 무참하게도 허물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상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주피터 승천하는 날 예의(禮儀) 없는 사막에는/마리아의 찬양대도 분향도 없었다./길 잃은 별들이 유목민(遊牧民)처럼/허망한 바람을 숨쉬며 떠 댕겼다./허나 노아의 홍수보다 더 진한 밤도/어둠을 뚫고 타는 두 눈동자를 끝내 감기지 못했다.’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을 보면서 ‘주피터 너는 세기(世紀)의 아픈 상처였다’고 목을 놓아 울었다. 그는 이상의 짧은 생애를 시대고의 희생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
김기림이 이상에게 부여한 ‘주피터’라는 이 새로운 이름은 그 예술적 재능에 충분하게 값했다. ‘주피터’라는 이름 그대로 이상은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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