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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장선희]세상을 바꾸는 ‘불편함’

입력 | 2017-04-10 03:00:00


인터넷상에서 ‘성차별’이라며 논란이 된 편의점 도시락. 인터넷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왜요? 내가 막내라는 게 입을 못 다물 만큼 놀랄 일이에요?”

KBS 2TV ‘개그콘서트’의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사람)’란 코너에는 ‘프로불편러’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상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도 예사로 넘기는 법이 없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꼬치꼬치 따지고, 뼈 있는 대답으로 상대를 기어이 한 방 먹이고서야 직성이 풀린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개그우먼 이수지가 연기하는 캐릭터다. 세상의 혹독한 외모 평가에 신물이 난 듯, 운동복 차림의 자신에게 무심코 ‘운동선수냐’고 묻는 이에겐 “치어리더다!” 하고 쏘아붙이고, 예쁜 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당신이 첫째냐’고 묻자 “막내다. 그게 그렇게 놀랍냐?”고 싸늘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뜻밖의’ 예민한 반응에 웃음이 터진다.

자칭 타칭 ‘프로불편러’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한때는 특정 사안에 과하게 예민한 이들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 말이지만, 요즘엔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그동안 사람들이 별 문제의식 없이 넘어갔던 것들에 대해 “이거 나만 불편해?”라고 질문한다. 그 덕분에 일상 속 차별과 혐오가 내재된 표현들이 여과 없이 콕콕 집혀 공론장으로 나온다.

그간 프로불편러 대열의 선봉에 선 건 주로 여성들이었다. 얼마 전엔 한 편의점이 새롭게 선보인 도시락 이름 때문에 누리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업체가 ‘여친이 싸준 도시락’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란 이름을 붙인 게 화근이었다. 프로불편러들은 “왜 남친이 싸준 도시락이나 아빠가 싸준 도시락은 없나” “여자를 밥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건 불편하다”며 비판했고, 그러자 한쪽에선 “그럼 엄마손 파이도 성차별이냐”며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라고 반박했다.

최근엔 프로불편러들의 활동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2월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선 ‘형,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연극이 상영됐다. 연극은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병영 문화의 부조리를 다뤘다. 방에 누워 잠든 신병을 보고 화가 난 소대장이 전원 집합을 시키고, 그러면 또 소대장은 병장을, 일등병이 신병을 닦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욕설과 폭력이 더해진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익숙했던 군대 문화가 새삼 불편하게 다가온다. 관객들 역시 ‘군대 문화, 나아가 계급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 등의 후기를 올리며 호응했다. 익숙했던 것들을 예민한 시선으로 꼼꼼히 들여다볼 때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도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한때 ‘둔감력(鈍感力)’이란 키워드가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소설 ‘실락원’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의사 출신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책을 통해서다. 작가는 예민한 성격은 수면부터 연애, 결혼생활, 심지어 암 치료에까지 도움이 안 된다며 ‘제발 둔감해지라’고 주문한다. 한마디로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고, 또 그 과정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고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가란 조언이다.

개인을 위해선 그 조언이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건 둔감함보단 ‘예민함’이 아닐까 싶다. 영화가 흥행하면 “여배우 무릎의 담요를 내려주겠다”던 한 중견 배우는 “불편했다”는 지적에 “경솔하고 미련했다”며 반성했다. 반대로 장난으로 남자 아이돌 가수의 몸을 만져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개그우먼 역시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웃자고 한 건데 뭘 따지냐”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불편하다’는 지적 덕분에 해당 연예인들도, 이를 지켜보는 일반인들도 내가 무심코 한 행동들을 다시금 돌이켜봤을 것이다. 매사에 편하기만 해선 바뀌는 게 없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프로불편러들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