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살고 싶다면 기본 의사소통 정도의 한국말을 배우는 것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주권을 따거나 귀화를 원한다면 한국어에 능통해지는 것은 의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 오랜 기간 거주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도 많다.
한국 거주 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어의 필요성’이라는 주제는 늘 뜨거운 감자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시간은 돈이며,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쏟는 시간은 나에게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합리적이긴 하다. 대개는 바쁜 인생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또, 한국어를 배우는 데 쏟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은 한국인 배우자의 부모님이나 아이들, 또는 한국인 친구들과 눈에 보이는 현금보다 더 깊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 귀중한 가치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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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좀 더 나누다가 친구가 한국말을 못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부부싸움을 할 때다. 흥분하면서 각자가 서로의 모국어로 싸움을 하게 된다. 부인이 내뱉는 모든 욕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그녀가 화났다는 것만 알고 사과를 빨리 하지만, 내용은 전혀 모른다. 부인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서 속이 시원하고, 남편은 자세한 내용을 모르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같이 보이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같은 싸움이 반복되는 문제점이 있다.
나는 그런 문제가 없다. 여자친구와 아주 잘(?) 싸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말을 잘하는 나도 못하는 척을 할 때가 있다. 지하철에서 참견을 잘하는 사람이 다가올 때나 혹은 택시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다. 상황 설명을 하면 이렇다.
일하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누군가와 인사를 시작할 땐 늘 똑같은 패턴의 질문들이 반복된다. “어디서 오셨나요?” “영국요.” “오! 신사네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영국 어디서 오셨나요?” “셰필드요.” “런던 말고는 잘 모르겠네요. 영국은 항상 비가 오죠?”(실제로 영국은 비 오는 날이 한국보다 30일 정도 더 많지만 연평균 강수량은 반밖에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하루에도 너덧 번을 해야 한다. 이런 지루한 대화를 피하기 위해서 나는 남에게 종종 한국어를 못하는 척하기도 한다.
그래도 한국말을 배우려고 투자한 시간은 1초도 아깝지 않다. 배워서 많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또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여친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한국에서 편하게 살고 있다. 한국말을 잘하는 덕분에 동아일보 같은 최고의 일간지에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도 효과를 못 느끼는 친구들에게 항상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긴 하다. 새로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면 ‘비정상회담’에 나가도 되겠다는 멘트를 상당히 자주 듣는다. 나도 자신감은 있어서 나가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연락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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