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 홍수 시대
‘영국과 일본의 저명한 정치학자들, 비정상적인 탄핵운동 지적.’
‘대한민국 박사모’ 온라인 카페에 이달 6일 이런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영국 정치학자 아르토리아 펜드래건과 일본 정치학자 히키가야 하치만(比企谷八幡)이 한국 국민의 박근혜 대통령 하야 요구를 비판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보수 성향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국내 주류 언론은 이런 내용을 거론조차 안 한다’ ‘외국인이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하지만 기사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이름을 학자 이름인 것처럼 속여 쓴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 ‘가짜’로 드러났음에도 이 글은 여전히 소셜미디어에서 진짜 뉴스로 둔갑한 채 퍼지고 있다.
어수선한 시국을 틈타 가짜 뉴스가 민감해진 국민을 자극하고 있다. 돈을 뜯어내는 범죄 미끼로도 악용되는 등 폐해가 심각하다. ‘찌라시’(사설정보지), ‘뉴스 어뷰징’(기존 기사를 자극적으로 재생산하는 행위)에 이어 이제 가짜 뉴스들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대선을 치른 미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내년 대선 준비가 한창인 독일에서도 가짜 뉴스들이 유권자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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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시작해 혐한, 범죄 도구로
스마트폰용 앱 ‘페이크뉴스’로 제작한 거짓 기사. 사진 출처 페이크뉴스 앱
가짜 뉴스 제작 사이트 ‘데일리파닥’에 정치, 연예 등 다양한 분야의 가짜 뉴스가 관련 사진과 함께 올라와 있다. 그간 제작된 기사 중‘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한국을 망치는 일’ ‘민주주의는 영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죽었다’ 등의 제목을 단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사진 출처 데일리파닥
가짜 뉴스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조직적인 선동 도구가 되고 있다. ‘한국신문’이란 매체는 홈페이지에 ‘한국 뉴스를 널리 전하는 것이 사업 목표다. 사회를 움직이는 게 목표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홈페이지의 기사들은 오히려 혐한 기류를 키우고 있다. ‘한국에서 기형아 시체로 통조림을 만든 기업이 적발됐다’는 거짓 기사는 최근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트위터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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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가짜 뉴스가 신사업
미국 가짜 뉴스 사이트 ‘70뉴스’에 지난달 12일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인단 수와 총득표 수 모두에서 승리했다’는 기사가 떠 있다. 실제로 힐러리 클린턴은 이 기사가 보도된 시점에 선거인단 수에서 뒤졌지만 총득표 수는 앞서고 있었다. 사진 출처 70뉴스
동유럽에선 가짜 뉴스가 구직 청년들의 돈벌이 수단이 됐다. 조지아에 사는 컴퓨터공학 전공자 베카 라차비제 씨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짜 뉴스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고백했다. 간단한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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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선호 세태, ‘팩트 폭행’ 낳아
거짓이어도 자기 입맛에 맞는 기사만 즐기려는 세태는 ‘팩트 폭행’ 현상까지 초래했다. 팩트 폭행은 사실을 밝혀 상대방의 정곡을 찌른다는 뜻이다. 사실을 접하는 게 폭력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보고 싶은 기사만 보려는 욕망 때문에 팩트 폭행이란 현상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가짜 뉴스가 인기를 끌면서 각국 정부와 대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몇 달 전 독일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 딸이란 허위 기사가 퍼졌다. 하이코 마스 법무장관이 나서 “가짜 뉴스 유포자를 철저히 수사하겠다. 가짜 뉴스 유포는 최대 징역 5년형까지 가능한 범죄”라고 엄포를 놨다.
가짜 뉴스 유통망이 됐다는 비판을 받은 페이스북은 거짓 뉴스를 걸러내겠다고 선언했다. 페이스북코리아도 본사 방침에 따라 내년부터 거짓 뉴스를 걸러내기로 했다. 국내 다른 포털에서도 강력한 오보 규제 조치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일부 포털이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오보를 견제하지만 강하게 규제하려면 거짓인지 아닌지 모호한 기사가 많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권기범·한기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