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우치다 타츠루 지음/김경옥 옮김/304쪽·1만3000원·민들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제작한 영화 ‘그랜 토리노’(2008년)의 한 장면. 주인공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웃에 사는 아시아계 소수민족 소년이 갱단의 비행에 휩쓸리는 것을 막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한다. ‘어른’의 모습이다. 동아일보DB
그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일본인을 소비의 주체로 만들며 원자화, 고립화했다. 공교육은 붕괴했다. 교사는 편의점 직원과 다를 바 없어졌고, 학생들은 학교 교육에서 비용 대비 효과를 견준다. 교육행정 당국, 정치인, 학부모, 교사들이 교육의 목적은 사적 이익의 추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족도 해체됐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에게 거의 따돌림을 당하는 존재가 됐다. 부권(父權)을 해체하는 데 앞장섰던 세대가 아버지가 된 뒤에는 부권 부재 현상에 당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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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른’이 필요하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사회 시스템을 보전하는 일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도 발아래 유리조각을 먼저 줍는 사람이 어른이다. ‘아이’는 내가 버린 것이 아니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종적인 인간관계도 되살려야 한다. 스승과 부모가 다음 세대의 성장을 지원했던 구조를 되살리고 공동체가 자녀를 양육할 젊은이들의 성숙을 돕자는 것이다.
저자는 단적으로 “공동체는 약자를 돕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유아는 ‘과거의 나’, 노인은 ‘미래의 나’, 장애인 병자 난민은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승자는 그 몫의 일부를 패자에게 나눌 의무가 있다. 로크와 홉스, 루소가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세울 때 했던 말을 300년이 지나서 반복해야 하는 현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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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