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 앞두고 충남 최대산지 아산 배추밭 가보니
배추밭을 바라보던 농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돌았다. 그는 배추를 만져 보더니 “지금 당장 내다 팔아도 될 수준이다”라면서 흐뭇해했다. 요즘 배춧값이 비싸 김장 물가가 오르는 게 아니냐고 기자가 묻자 알 듯 말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10월인디…. 쬠만 기다려 봐유. 배춧값은 어제랑 오늘이 다르니께….”
배추를 비롯한 각종 채솟값이 급등하면서 올해 김장 물가 부담이 커질 거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항목에서 배춧값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52.5% 오른 것으로 나타나면서 전통시장과 대형 마트에서는 ‘채소 가격표를 쳐다보기도 겁이 난다’는 주부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물가 당국인 기획재정부와 농림축산식품부 등은 “김장철이 되면 채소 가격이 안정될 것이다”라며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 고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가을 배추 농사는 풍년
충남에서 가장 큰 배추 생산지인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일대. 이곳에서 키운 배추는 현재 전국 각지로 출하되고 있다. 아산=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봄에 모를 심고 가을에 추수해 1년에 한 번 거두는 벼와 달리 배추는 18∼20도 기온에서 심은 지 60∼90일만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다. 여름에 심었던 강원 고랭지배추는 10월 중순을 끝으로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됐다. 지금은 ‘김장 배추’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할 때다. 10월 하순 충남 아산 당진 등 충청 북부 및 경기 남부 지방을 시작으로 수확지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간다. 김장 피크 시즌인 11월 하순에는 전남과 경남 남부 지방에서 가을 배추를 거둔다.
여름 배추 농사는 올해가 ‘최악의 한 해’였다면 가을은 ‘최상의 계절’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7, 8월에는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이 겹치면서 고랭지 배추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올여름 고랭지 배추의 10a(아르)당 생산량은 2989kg으로 지난해보다 21%나 줄었다. 생산량이 감소하니 배춧값이 오르는 건 당연했다. 7월 서울 가락시장의 배추 도매가격은 상품(上品) 10kg 기준 평균 1만5250원으로 1년 전보다 122% 급등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9월 전국 배추 평균 소매가격은 상품 1포기 기준 7886원으로 1년 전보다 183.4%나 급등했다. ‘배추가 금(金)추’, ‘배춧값이 미쳤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가을 들어서는 상황이 확 달라졌다. 20도 안팎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됐고 비가 제때 내려 배추를 키우기에 날씨가 알맞았다. 아산 세교리에서 만난 한 농민은 “가을 배추 키우기에 올해만큼 기후가 좋은 해도 드물다”라고 말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9월 아산 인근 천안의 평균 기온은 21.0도, 강수량은 55.0mm였다. 지난해 같은 달 강수량이 20.5mm에 그친 걸 감안하면 비가 충분히 내린 셈이다.
기후 조건이 좋았으니 올 김장 배춧값은 안정을 되찾을까. 노 팀장은 “지금보다 떨어지는 것은 맞지만 지난해 김장철보다 낮아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다”라며 조심스러워했다. 작황은 좋지만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재배 면적이 줄어들면 배춧값이 오른다. 지난해의 경우 배추 재배 면적이 전년 대비 16.5% 감소하자 배춧값(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상품 1kg당 11, 12월 도매가 기준)은 9.7%(401원→440원) 올랐다. 다만 올해는 지난해보다 재배 면적 감소율이 낮고, 좋은 날씨로 작황이 아주 나쁘진 않은 만큼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소폭 오르는 정도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농촌경제연구원 측은 “이달 중순까지는 가격이 비쌌지만 가을 배추 출하가 본격화되면서 하순 들어 가격 내림세가 눈에 띈다”라며 “11월 배춧값은 출하량 감소로 지난해보다 소폭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밝혔다.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낮아”
채솟값이 조금만 올라도 주요 매체는 관련 물가 소식을 주요 뉴스로 다룬다. 그만큼 서민의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상황을 난감해한다. 기재부 당국자는 “채소가 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품목인 건 맞지만, 채솟값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다”라며 “일반 소비자물가지수와 장바구니 물가가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곤혹스럽다”라고 말했다.
기재부의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통계청은 식료품, 공산품, 서비스 품목 등 482개 품목의 가격에 가중치를 매겨 매달 1일 물가지수를 공표한다. 전체 가중치를 1000으로 봤을 때 배추의 가중치는 1.7이다. 배춧값이 전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는 뜻이다. 가중치가 33.9인 스마트폰 이용료나 30.8인 월세, 6.4인 쌀 등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김치가 끼니마다 밥상에 올라 식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물가와 직접적 연관도가 높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배추 1포기에 1만 원이라고 해도 1인당 매달 5만 원 이상, 4인 가구 기준으로 20만 원 넘게 내는 스마트폰 요금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 김치는 대개 김장철과 봄, 가을 등 1년에 3번 정도 담가 먹는 게 보통이다. 매일 김치를 먹어도 김치 담그는 데 쓰는 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부들은 배추보다 고추, 마늘, 생강, 새우젓 등 김치 부속 재료 가격에 더 민감하다. 다만 이들 양념 재료는 날씨에 민감하고 저장이 어려워 가격 등락이 심한 배추와 달리 상대적으로 가격이 안정적이다.
최근에는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포장 김치를 사 먹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이마트에서 올 8월 1일부터 이달 24일까지 포장 김치 매출(136억 원)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38.4% 증가했다. 요즘처럼 배춧값이 급등하는 시기에도 대다수 김치 업체들은 판매가를 쉽게 올리지 못한다. 김치의 물가지수 가중치(0.7)는 배추의 절반도 안 되지만 점점 커질 여지가 높다는 게 정부의 전망이다. 농식품부는 “본격적인 김장철은 11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만큼 조만간 관계기관 점검회의 및 협의를 거쳐 김장 채소 수급 가격 안정 대책을 수립해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아산=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