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40년 고고학계 두 사건… 미스터리에 대한 새로운 주장들
1978년 경북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대형 치미로 높이가 1.8m에 달해 동양에서 가장 큰 치미로 꼽힌다(위쪽 사진). 1983년 전남 신안군 증도 앞에서 수중발굴팀이 신안해저선의 선체 일부(용골)를 인양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궁궐 짓다가 말고 사찰 세운 까닭은?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왕실 사찰로, 발굴 당시 높이가 1.8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치미(치尾·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가 출토됐다. 9층 목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 천사옥대(天賜玉帶)의 신라 3대 보물 중 두 개가 황룡사에 있었던 걸 봐도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황룡사가 어떤 배경과 이유로 건립됐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14년(553년) 봄 2월, 임금의 명에 의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곳에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지은 뒤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사실과 설화가 뒤섞인 간단한 내용만 적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황룡사 창건과 신라 중고기 황룡사의 위상’ 논문에서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신라가 6부 체제에서 국왕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바뀌면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황룡사 건립이 추진됐다고 봤다. 선대 법흥왕의 무덤을 6부 체제의 잔재인 대릉원 밖으로 옮기는 동시에 자신이 살던 왕궁을 신축하는 등 대대적인 왕경 정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친정을 시작한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정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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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몰한 신안해저선 고려에 들렀을까?
1323년 6월 중국 원나라 경원(慶元·현 저장 성 닝보)에서 출항한 뒤 침몰한 신안해저선에서는 무려 2만4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워낙 수량이 많아 1976년부터 9년에 걸쳐 수중 발굴이 이뤄졌다.
한중일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했지만 정확한 항로와 구체적인 침몰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특히 신안선이 침몰하기 전 고려를 경유했는지가 불확실하다. 발굴보고서나 다수설은 고려 유물이 10여 점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한반도를 들르지 않고 일본 하카타(博多·현 후쿠오카)로 향하다 가라앉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 다른 의견이 제기됐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27일 발표한 ‘신안선의 항로와 침몰 원인’ 논문에서 “신안선은 고려 개경에 들러 상품 하역과 선적을 마친 뒤 최종 기착지인 일본으로 가던 도중 침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심 논거는 신안선 발견 장소가 경원∼하카타 직항로에서 너무 멀리 있고, 음력 6∼8월 한반도 해류는 남서풍이나 남동풍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항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려 유물이 극소수라는 지적에 대해 김 연구관은 “고려 특산품인 모시나 삼베는 유기물이라 바닷속에서 부식돼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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