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믜리도 괴리도 업시/성석제 지음/284쪽·1만2000원·문학동네
성석제 씨의 새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의 표제작의 첫 장을 읽으면 딱, 감이 온다. ‘첫사랑’의 후속편이구나. ‘너에게서 전화가 온 건 꼭 오 년 만이었다’는 첫 문장부터 그렇다. 유년시절의 ‘너’는 부친의 도산으로 한순간에 귀공자에서 ‘만인의 똥개’로 전락했다. 전학 온 뒤 만난 ‘너’가 “늘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하자 ‘나’는 “징그럽게 왜 이래”라고 몰아치면서도 야릇한 관심을 내치지 않는다. 중년의 ‘너’는 금발의 동성 애인을 둔 재불 화가가 돼서 나타나고, 묘한 질투를 느끼는 ‘나’에게 매몰차게 한마디 한다. “나도 눈이 있고 수준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내 취향이 아니야.” 첫사랑의 순정을 애틋하게 묘사했던 작가는, 그 무렵의 소년들을 성장시켜 세상 풍파에 시달리게 하고는 중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특유의 입담 또한 적나라할 정도로 드러남은 물론이다.
‘블랙박스’에도 ‘너’가 등장한다. 글쓰기가 막힌 소설가 화자와 동명이인인 ‘너’는 쓰다 만 화자의 소설을 마무리해 주고, 화자를 대신해 소설을 써준다. 창작을 배운 적도 없는 ‘너’가 쓰는 소설은 서투른 듯하지만 감동이 엄청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너’가 진짜 대필자인지, ‘나’의 소설 속 인물인지 의문이 생긴다. 중견 소설가의 창작의 고뇌도 소설로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능력이 여간 아니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