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군사전문기자
단 한 발로 수만 명을 살상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원폭의 위력은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전 인류에게 충격을 안겼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수천 기의 핵미사일을 서로 겨눴지만 ‘핵단추’를 누를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묵시록을 보는 것 같은 핵 파괴력의 공포 때문이었다.
상대를 끝장낼 수 있지만 절대 사용해선 안 되는 핵무기의 ‘패러독스’는 핵전략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어로 ‘미친’과 같은 뜻의 ‘상호확증파괴(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전략은 핵을 사용하면 ‘너 죽고 나 죽는다’는 섬뜩한 경고다. 서로를 절멸시킬 핵무장력으로 ‘공포의 균형’을 달성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전략도 같은 논리다. 결국 핵은 핵 이외 다른 수단으로 저지할 수 없다는 게 핵 억지 전략의 요체다.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핵공격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핵무장론이 힘을 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경제·외교적 제재를 무릅쓰고라도 북핵 저지를 위해 최소한의 핵 자위력을 갖추자는 주장은 일견 설득력 있게 들린다. 초유의 안보위기를 맞아 가능한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정권 유지와 국가 존립을 동일시하는 김정은은 딴마음을 품을 수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거나 정권 생존의 단 1% 가능성만 있어도 핵을 사용할 개연성이 있다. 김정은이 전 인민이 희생돼도 상관없다는 ‘이판사판식 핵 도박’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한국이 핵을 가져도 억지는 힘들 수밖에 없다.
핵무장과 핵 사용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도 간과하기 힘들다. 북한의 핵 선제 공격 징후 시 한국 같은 고도의 민주국가가 핵 전면전을 감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핵 공격 임박 징후 때 대북 핵 선제 타격 여부를 놓고 극심한 국론 분열과 갈등도 빚어질 수 있다.
북한의 핵을 저지하거나 실전에 사용하기 어려운 핵무기라면 ‘종이호랑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설픈 핵무장론은 김정은의 핵을 합리화해 주고, 한국의 입지만 좁히는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대한(對韓) 확장 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북 지휘부를 겨냥한 탄도미사일과 핵·미사일 기지를 고철로 만드는 고출력마이크로웨이브(HPM)탄 등 역비대칭 무기를 개발해 배치하는 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안보 포퓰리즘’에 편승한 핵무장론은 결코 북핵 저지를 위한 건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