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애니 제이콥슨 지음/이동훈 옮김/716쪽·2만3000원·인벤션
1969년 인간을 달로 보낸 새턴 5호 로켓 모형을 든 아르투어 루돌프. V병기 조립 전문가로, 나치의 노예노동 공장 운영부장을 지낸 그는 미국에서 새턴 5호 로켓의 프로젝트 관리자로 일했다. 1983년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미국을 떠났다. 인벤션 제공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생체 실험을 거듭한 독일 과학자들은 놀라운 결과물을 갖고 있었다. 탄도미사일, 사린 가스, 로켓 포격 기술, 생화학무기…. 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소련보다 먼저 이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페이퍼클립’에 강한 추진력을 부여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공식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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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전작 ‘에어리어51(Area51)’ 집필을 위해 자료를 찾다 독일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의 최고위 기술자문이었던 지크프리트 크네마이어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미 공군을 위해 일했고 국방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을 받은 사실에 경악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정부 기관, 대학, 도서관, 교도소를 찾아다녔을 뿐 아니라 나치 과학자 2세까지 인터뷰했다. 28쪽에 달하는 참고문헌과 인터뷰한 인물 등의 목록은 저자가 발로 뛴 흔적을 증명한다. 이 책은 나치 과학자 21명의 행적을 집중 조명한 결과물이다.
방대하고 치밀한 취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충격적이다. V-2 로켓으로 영국과 벨기에의 도시 3000개를 폭격한 베른헤르 폰 브라운은 나치 친위대 장교였지만 미국에서 우주 연구의 유명 인사로 급부상하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의 연구팀은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선보였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과학훈장까지 받았다.
나치 과학자들을 받아들인 데 항의하는 목소리도 컸다. 한 기자는 ‘아들아, 대량살상을 즐기지만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긴다면 과학자가 되어라’라는 글을 쓰며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짙은 어두움을 향해 간다. 소련 스파이를 대상으로 최면 상태에서 정보를 말하게 하는 약물을 실험하던 중 연구자인 박테리아 학자 프랭크 올슨에게 몰래 약물을 주입하며 결과를 관찰했다. 두려움과 흥분에 휩싸이며 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올슨을 보며 미국 정부는 그가 기밀을 소련에 누설할 가능성을 염려하기에 이른다. 결국 올슨은 호텔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다. 사건은 자살로 처리됐다. 괴물(독일)을 패망시켰고 또 다른 괴물(소련)을 견제한다고 자부했던 미국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갔다.
한편 독일 과학자들은 실생활에도 기여했다. 음료업계는 열처리를 하지 않고도 과일즙을 살균하게 됐고 실이 풀리지 않는 양말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효모를 무제한으로 생산할 수도 있었다. ‘히틀러의 마법사’들은 미국이 군수산업, 우주공학, 상업, 공업 등 각 분야에서 비상하는 도약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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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