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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도피 16년 거지행세 살인범, 한국서 온 ‘저승사자’에 딱 걸렸다

입력 | 2016-09-23 03:00:00

현지파견 경찰 ‘코리안데스크’ 활약




 “여기 살인자가 숨어 있다.”

 필리핀 중남부 세부에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한국인 살인자가 살고 있었다. 오래전 한국에서 참혹한 범행을 저지르고 도피했다는 소문만 있을 뿐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교민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두려워 그 이야기를 쉽사리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올해 4월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담당관으로 심성원 경감(39)이 파견됐다. 심 경감은 밑바닥 범죄 정보까지 훑기 위해 현지 교민과 필리핀인을 만나 국외 도피 사범 첩보를 수집하다가 살인자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세부 경찰주재관 이용상 경정(42)이 그간 수집한 첩보와 종합해 보니 경찰청 국외 도피 사범 명단에 있는 살인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장의사 부부를 살해한 강모 씨(47)였다.

 강 씨는 2000년 11월 공범 이모 씨(49)와 함께 경기 가평군 설악면 야산에서 장의사 조모 씨(당시 39세) 부부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이 씨는 부부에게 병원 영안실 운영권을 따주겠다고 속여 1억1000만 원을 가로챘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자 교도소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강 씨와 함께 살해한 것이다. 범행 직후 검거된 이 씨는 사형 선고를 받아 복역 중이지만 강 씨는 종적을 감췄다.

 강 씨가 향한 곳은 도피 사범의 천국으로 불리던 필리핀이다.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에만 도착하면 정체를 감추고 살 수 있었다. 필리핀 밀항선 조직은 육지가 보이자 강 씨에게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했다. 그가 죽자 살자 헤엄쳐 닿은 곳이 필리핀 민다나오였다.

 다음 해 세부로 이동해 가명으로 생활했다. 현지인이 거주하는 공간에 살며 한국인과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를 목격한 사람은 “거지처럼 살았다.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과 여행사에 나타나 돈을 구걸하거나 빼앗기도 했다. 관광객에게 겁을 주고 돈을 뜯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이 경정과 심 경감 귀에만 그의 존재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숨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달 5일 한국 경찰의 공조 요청을 받은 필리핀 이민청 도피 사범 추적팀은 강 씨가 은신 중이던 콘도를 급습했다. 검거 직후 경찰은 강 씨의 지문을 채취해 e메일로 경찰청에 보냈다. 한국에서 대기 중이던 본청 과학수사담당관실은 3분 만에 강 씨 신원을 확인해 답신을 줬다.

 강 씨는 16년 만에 검거되자 낙담한 듯 자해를 시도했다. 아이러니하게 강 씨는 공범 이 씨를 가장 보고 싶어 했다. 강 씨는 “나는 이 씨의 꾐에 넘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이게 됐다. 이 씨 얼굴을 꼭 보고 죽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은 강 씨를 21일 국내로 송환했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도피 사범 검거와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전담하는 코리안데스크 담당관 6명이 활약 중이다. 이달 중순에도 앙헬레스에서 2003년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한 살인범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