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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펜스의 한국 블로그]佛-美보다 번역 빠른 한국 출판계

입력 | 2016-09-0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벨기에 출신 열린책들 해외문학팀 차장

휴가철이 끝나고 가을의 초입에 들어가면서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 베스트셀러를 둘러싼 얘기다. 가장 오래된 사례를 찾아보려면 생각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베스트셀러’란 말 자체가 19세기 말에 처음 쓰였다. 그렇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은 책으로 정의한다면 ‘인기 도서’는 19세기보다 훨씬 오래된 현상이다.

역사상 국제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는 17세기 초에 출간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제1권이 1605년에 스페인에서, 그리고 포르투갈 페루 플랑드르, 또 이탈리아에서 거의 동시에 발행됐다. 그 후 1612년 영어 번역, 1614년 프랑스어 번역을 거쳐 출간됐다. 어디나 이 책이 나오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고 말 그대로 ‘즉각적인 고전(instant classic)’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키호테’ 완역판이 2004년에야 출간된 걸로 알고 있다. 좀 늦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후에 나온 여러 한국어판이 꾸준히 팔리는 모양이다.

17세기 이후에는 책이 세계화되는 과정이 무척 빨라졌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빅 타이틀’들은 이제 원서가 출간되기 전에도 온 세계의 각 시장에서 현지 언어 출판으로 미리 계약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외서를 번역하는 절차가 많이 짧아졌고 다른 나라보다 한국 출판사가 훨씬 빠른 경우가 꽤 있다. 번역판이 한국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사실 한국이야말로 도서의 세계화가 강하게 느껴지는 환경이다. 한국 독자가 수십 년 전부터 세계문학에 큰 관심을 보여 주고 있고 1990년대부터 한국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외서를 번역해서 열심히 소개해 왔다. 2014년 한국 출판 시장에서 신간 가운데 외서의 번역판은 2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비교적 해외 문학을 잘 발굴하는 편인 프랑스는 17% 정도이며, 미국은 3% 정도밖에 안 된다. 미국 출판사, 미국 독자를 겨냥한 시장에서는 영미 문학 이외의 문화권이 발을 들여놓기 어렵다. 미국만큼 세상에 많은 영향을 주는 나라도 드물다. 그런데 미국이 다른 나라의 문학을 무시하면 일방적인 교류가 될 위험이 크고 세계문학의 다양성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출판계가 세계 베스트셀러 공장이니까 라이선스 수출이 수입보다 훨씬 많은 것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한국은 그 반대의 상황이다.

요새 미국을 포함해 온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특별한 세계 베스트셀러가 하나 있다. 미국 도서가 아니라 이탈리아 소설이다. 신비로운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7월 한국에서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김지우 옮김)가 출간됐다. 한국에서도 반응이 따뜻해 보여서 좋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책표지가 해수욕장에서 보기 좋은 ‘가벼운 책(beach read)’ 같은 느낌을 줘서 좀 아쉽다는 것이다.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문학성이 높은 야심 찬 작품이라 유치하지 않고 멋진 표지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1950년대 나폴리의 내레이터 엘레나(별명은 ‘레누’)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릴라, 두 이탈리아 여자의 깊게 얽힌 우정 이야기다. 범위가 있는 대단한 대하소설이다. 20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맛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개성과 열정이 풍부한 연재 드라마같이 잘 읽히는 ‘모던 클래식’이다.

몇 년 전부터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연말에 여러 출판인이나 편집인들한테 세 가지의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싣는다. 그 질문은 ‘올해 작업한 책 중에 가장 성공적이거나 자랑스러운 책’, ‘기획한 책 중에 주목을 더 받을 자격이 있었던 가장 아까운 책’,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다른 출판사의 책’ 등이다. 연말에 누가 이 질문을 던져 주면 마지막 질문에는 나는 주저 없이 ‘나의 눈부신 친구’라고 답하겠다.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은 유난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레고리 림펜스 벨기에 출신·열린책들 해외문학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