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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홍릉과 유릉, 좌절된 자주권의 열망

입력 | 2016-07-21 03:00:00


일제의 식민지배 의도가 담겨 있는 유릉의 석물들.

경기 남양주시 금곡에 있는 조선 고종의 홍릉(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 이곳은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침전(寢殿·왕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 사이 신도(神道) 양옆에 줄지어 선 석물(石物·돌조각)들이다.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의 석수(石獸)를 두 줄로 도열하듯 배치해 놓았다.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보통 조선왕릉의 석물은 침전 앞이 아니라 침전 뒤쪽 봉분 주변에 둘러서 있다. 석수는 호랑이 말 양이 전부였다. 그런데 홍릉 유릉에선 석물을 세운 위치도 달라진 데다 전례에 없던 코끼리 낙타 기린이 등장한다.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청나라와 대등한 나라를 만들고 근대화를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은 황제였기에 자신의 무덤도 중국의 황제릉처럼 만들고자 했다. 능의 구조를 직접 구상했을 정도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승하했고, 황제릉에 대한 고종의 의지는 홍릉에 반영되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홍릉 옆에 유릉이 조성되었다. 유릉의 석물은 홍릉의 것보다 더 크다. 동물 조각은 더욱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문석인, 무석인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서구 조각 분위기다. 유릉 조성은 일제가 주도했고 석물도 일본인 조각가들이 제작했다. 그들은 근대적 조각술을 조선왕릉에 적용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왕릉 석물을 제작해 오던 방식과 달리 모형을 떠서 그것을 토대로 작업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그 시대의 예술작품을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조선의 전통 문화와 미술을 폄하하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고종에게 대한제국은 근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조선의 위상을 회복하고 자주권을 되살리기 위한 열망이었다. 살아서 대한제국을 잃었지만 죽어서 황제릉이 조성되었으니 어쩌면 그 열망이 이뤄진 것일까. 아니다. 유릉에 이르러 근대의 꿈은 무너졌다. 일본인들이 만든 석물은 근대 조각이기에 앞서 조선의 전통과 왕실에 대한 훼철이었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홍릉과 유릉. 초입에서 두 줄로 도열해 사람을 맞아주는 석물들. 언뜻 보면 당당하지만 그 내력을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