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추다. 살펴보건대, 와거(와거)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
‘와거’는 상추의 옛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부로’ 혹은 ‘부루’라 불렀다. ‘부루’라는 이름은 지금도 사용한다.
그 이전의 중국 측 기록에도 상추는 등장한다. 송나라 팽승(985∼1049)의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는 “와채(와菜)는 와국(와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했다. ‘상추 와(와)’는 ‘고(高)’와 비슷하다. 혼동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와국’이라는 나라는 없다. 북송 때 사람인 도곡(?∼970)이 쓴 ‘청이록(淸異錄)’에는 상추를 두고, “고국(高國)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적었다. ‘와국’은 ‘고국’이고 바로 고구려다.
어느 설이 맞든 고구려에서 상추가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구려 시절부터 우리는 상추를 먹었다, 고구려의 상추가 좋았다, 그 씨앗을 중국인들이 높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이다. 상추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반도의 채소류 중 더러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있다. 고구려 시절에는 상추가 그러했다는 뜻이다.
폭군 연산군은 폐위 1년 전인 연산군 11년(1505년) 3월, 가당찮은 명령을 내린다. “궁궐로 올리는 채소들은 모두 뿌리째 싱싱하게 가져오라. 뿌리에 흙을 얹어 마르지 않도록 하라.”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채소를 싱싱한 채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한양 도성에 도달하면 대부분 말라 죽으니, 돈을 주고 도성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 더하여, 경기감사에게는 특별히 “순채, 파, 마늘, 상추를 올리라”고 명한다. 신선한 채소와 생선 등은 주로 한양 근교 경기도에서 구했다. 콕 집어서 상추를 이야기했다. 연산군은 상추를 비롯한 ‘채소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연산군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상추를 즐겨 먹었다. 대표적인 음식이 상추쌈이었다.
‘상추를 먹으면 잠이 온다’는 사실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상추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빼놓지 않고 먹어야 할 채소”라고 했다. 거꾸로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이는 일도 있었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에서 “상추는 들밥을 내갈 때나 손님 대접할 때 늘 준비한다.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일 수 있는데, 이른 새벽에 파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상추를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산림경제’에서는 뼈가 부러지거나 힘줄이 끊어졌을 때에는 상추 씨앗을 살짝 볶은 다음 가루를 내서 술에 타 먹으면 힘줄, 뼈 등을 쉽게 붙일 수 있고, 궤짝 안의 옷을 좀벌레가 먹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단오일의 상추 잎을 궤 속에 넣는다고 했다.
성종 때 호조참의를 지낸 신수근은 어린 시절 귀 뒤에 생긴 종기를 평생 달고 살았다. 성종이 내약방(內藥房)을 불러 신수근의 종기를 치료한다. 내용은 ‘황국사(黃菊沙), 임하부인(林下婦人), 와거경(와거莖)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꿀에 타서 종기 부분에 붙이라’는 것이다. 임하부인은 으름이고 와거경은 상추 줄기다. 황국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 치료법을 믿고 따르기는 힘들다. 품종도 전혀 다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