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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서영아]히로시마, 100년 전의 데자뷔

입력 | 2016-05-30 03:00:00


서영아 도쿄 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히로시마(廣島) 방문이 끝났다. 도쿄(東京)에서 취재하면서 심경이 복잡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끊임없이 느껴지는 미일의 밀월, 꼼꼼히 한 걸음씩 준비해가는 일본의 주도면밀함, 오바마 방문이 일본에 면죄부를 줄 것이라는 우려밖에는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

문득 예전에 읽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번역서 제목 ‘미국, 한국을 버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20세기 초 뒤늦게 쇄국에서 벗어나 생존의 길을 찾아 헤매던 고종과 대한제국의 서글픈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1882년 이후 고종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미국에 주선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고종은 이 조약을 상호동맹으로 생각한 반면 미국은 국교 수립에 따른 인사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즈음해서는 더욱 참담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기간 1901∼1909년)은 동아시아에서 위협적인 존재이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선 일본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1905년 7월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도쿄로 보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고는 9월 ‘일본은 한국에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을 중재했다. 루스벨트는 이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고종은 1905년 9월 루스벨트의 딸이 서울에 오자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극진히 대접했다.

루스벨트의 ‘친(親)일본’은 일본 소프트외교의 산물이기도 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시아를 공격할 때 루스벨트의 하버드대 동창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아예 워싱턴에 눌러 살게 했다. 그는 일본 유도 선수를 데려다 루스벨트에게 유도를 가르쳤고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영어로 쓴 책 ‘무사도(武士道)’를 선물했다. 루스벨트는 사무라이의 정신세계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미국의 주된 경계 대상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지만 일본 중시는 마찬가지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은 미일 동맹이 핵심이다. 일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요구에 일본은 철저히 응답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미일 양국 모두에 이익이었다. 오바마는 ‘핵 없는 세계’라는 외교적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최고 수준의 미일동맹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전쟁 피해국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히로시마 사람들…. 적어도 30여 년 전부터 핵에 의한 비극이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외치며 세계 요인들에게 히로시마 방문을 요청해 온 그들의 노력도 보상받았다.

한국은…. 100여 년 전 고종은 국제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미국과 일본의 진의가 무엇인지 기본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치(國恥)를 당했다. 지금 우리는 그래도 미국 일본 중국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안다. 미중일의 밀착과 길항 속에서 우리 국익을 최대화하는 길을 찾아 준비하고 행동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오바마의 한국인 위령비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연설에서 ‘한국인의 희생’은 언급됐다며 안도하는 듯하다. 이런 미온적 대응으로 급물살을 타는 동북아 새 질서에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