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조선시대에는 나를 ‘소어(蘇魚)’라고 불렀다. ‘소어소(蘇魚所)’는 궁중에 소어를 공급하는 기관이다. 임금님과 궁중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사옹원 소속의 기구였다. 궁중에서는 경기도 안산에 소어소를 두었다. 나와 동족들은 경상도 동래부 앞바다에도 살고, 서해와 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잡혔다. 남해안에서는 나를 ‘디포리’라 부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소(所)’가 붙은 관청은 상당수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금은을 채취하고 공급하는 기관은 ‘금소(金所)’ ‘은소(銀所)’였고 옹기를 공급하는 곳은 옹기소였다. 소어 공급 기관은 당연히 소어소였다. 고려시대에도 나를 잡아 바치는 기관이 있었다니 이 땅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먹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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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좁아 곧 죽어버리는 생선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은 젓갈로 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내 이름 ‘소어’와 더불어 ‘염(鹽·소금)’ 혹은 ‘소어해(蘇魚해·밴댕이젓갈)’라는 단어가 더불어 나타난다.
‘만기요람’에는 새우젓 한 통 값이 7냥 5전, 밴댕이젓은 8냥 4전이며 왕대비전의 연간 소비량이 새우젓은 69통 남짓, 밴댕이젓은 33통 남짓이라고 했다. 가격은 비슷하나 사용량은 새우젓의 반 정도다. 나와 동족들은 젓갈로 널리 사용되었지만 말려서도 사용되었다.
정조 16년(1792년) 2월, 청나라 상주부(常州府) 사람들 아홉이 서해 하의도에 표류했다. 나주목사가 올린 장계에 내 이름이 등장한다. ‘별다른 혐의점은 없고 단순 표류자로 보인다. 조사 후에 쌀, 미역, 조기, 참기름, 소금, 장, 땔나무와 더불어 밴댕이 열다섯 두름을 주어 보낸다.’
왕족이면서 안산 바닷가 가까운 수리산 기슭에서 전원생활을 했던 옥담 이응희는 ‘(단오가 가까워지면) 밴댕이가 어시장에 가득 나와/은빛 눈이 마을 여기저기 깔리는 듯/상추쌈으로 먹으면 그 맛이 으뜸이고/보리밥에 먹어도 맛이 대단하네/시골에 밴댕이마저 없으면/생선 맛을 알 사람이 드물리라’고 했다(‘옥담사집’). 시골에서는 굽거나 회로 만들어 상추쌈에 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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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차천로(1556∼1615)는 ‘오산설림초고’에서 ‘화담 서경덕은 늘 담백한 식사를 했고 다른 사람이 주는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았다. 화담은 말린 밴댕이를 즐겨 먹었다’고 했다. 나와 동족들은 귀한 제사상에도 올라갔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미암일기’에서 ‘김안국 선생(1478∼1543)의 사당에 제물로 생꿩, 말린 민어, 게 등과 더불어 밴댕이 한 두름을 올렸다’고 했다.
왜 사람들은 나를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부르고 천시했을까. 그 답은 허균의 ‘도문대작’에 있다. ‘물고기 중 흔한 것은 민어, 조기, 밴댕이, 낙지, 준치 등으로 서해 곳곳에서 나는데 모두 맛이 좋아 다 기재하지 않았다.’ 흔하고 잘 상하니 천시한 것이다. 억울하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