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수 경제부 차장
요즘 정책 당국과 한국은행이 신경전을 벌이는 모양새가 딱 이렇다. 조선·해운업을 수술한다(구조조정)는 원칙에는 서로 동의했지만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의견이 엇갈린다.
정부는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외적으론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정부가 추경을 꺼리는 이유는 국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랏돈 씀씀이를 늘리려면 국회 표결을 거쳐야 한다. 정책 당국자들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에 불려 가면 이런 비난들이 쏟아질 게 분명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들이 한 일이 뭐냐” “잘못한 사람 먼저 잘라라”…. 기업 부실 원인과 대응능력, 책임소재 등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건 큰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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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입장은 어떤가.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통화정책 담당)가 지난달 29일 통화신용정책 보고서 설명회에서 했던 말이 한은의 속내를 정확하게 대변한다고 본다.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의 자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다.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은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 등 정당한 절차를 거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직역하면 “너희가 치워야 할 똥을 왜 우리가 치우냐”는 것이다.
한은은 물가 안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이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발권력 동원이 탐탁할 리가 없다. 특정 업종(조선·해운업)을 위해 돈을 대는 것도 불만이다. ‘앞으로 이렇게 기업들이 힘들 때마다 손을 벌리겠다는 거냐. 중앙은행이 너희들 편할 때마다 돈 꺼내 쓰는 지갑이냐.’ 이렇게 한은 사람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눈에 선하다.
하지만 정국의 최대 화두로 구조조정이 떠오른 데다 청와대까지 나서서 ‘한국판 양적 완화’를 외치는 마당에 한은만 왕따가 될 수는 없는 법. 급기야 이주열 한은 총재가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현금 출자보다 대출이 적합하다”며 ‘절충안’을 내놨다. 대주주로 참여해 돈을 댔다가 부실이 악화되면 손해를 볼 수 있으니, 담보를 잡고 이자도 받는 대출이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발권력은 동원하되 법 개정이 필요 없는 안이다. 하지만 정부는 나중에 한은에 부채를 갚을 필요가 없는 출자 방식을 원하고 있다.
정부와 한은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눔프(NOOMP·Not Out Of My Pocket)’라는 말이 떠오른다. 눔프는 사람들이 정부의 복지 확대를 원하지만 자신의 비용부담은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정부와 한은은 “구조조정은 해야 되지만 내 지갑은 못 연다”고 버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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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통 터지는 국민 정서를 생각한다면 정부와 한은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김상수 경제부 차장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