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작년 가을이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류학자와 함께 인류 진화에 대한 책을 냈다. 출판사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진화의 여러 국면을 묘사한 판화풍 일러스트를 덧붙여 출간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 두 발로 걷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불을 피우는 모습 등 다양했다. 출판사에서 미리 보여줬을 때, 나는 그림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고 만족했다. 그런데 공저자인 교수가 그림을 보자마자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인류는 남성만 있던 게 아닌데요?” 다시 보니 정말 그림의 주인공이 대부분 남성이었다. 인류의 대표는 남성이 아닌데, 인류 역사를 묘사하는 그림에서는 남성이 대표였다. 여성이 묘사된 사례는 출산이나 육아를 표현한 그림이나, 제목에 ‘할머니’가 들어간 그림 정도였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을, 실수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부분일지 모른다. 하지만 평소 이 부분을 세심하게 관찰해 온 전문가의 눈은 달랐고, 나는 그 시선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최근 나는 이 문제에 내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자부했다. 내용을 설명해주는 과학자 다수가 남성이어서 혹시라도 남성 중심의 서술은 지양하도록 기자들에게 당부했고, 문장에서도 대상의 성별이 내용상 중요하지 않은 이상 ‘그녀’ 등의 단어도 사용을 자제해 왔다. 강연자를 섭외할 때도 여성 강연자의 비율에 신경 썼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룩할 수 없는 게 평등이다. 관성은 힘이 세서, 잠깐만 의심의 끈을 놓으면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그리고 최근 그 일을 겪었다.
젊은 과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도한 기획 기사에서였다. 실력과 경력을 갖춘 박사학위 소지자는 점점 늘어나는데, 안타깝게도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한 기사였다. 이야기가 너무 암울할 것을 우려해 만평 형식의 재치 있는 그림을 곁들였는데, 그 그림이 문제였다.
나중에 문득 보니, 이 그림에 묘사된 18명의 과학자 가운데 여성은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림 속 과학자는 94%가 남성이었다. 과학은 남성만 하나. 이공계 전공자는 남성뿐인가. 물론 아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자 그림을 주문하자 당연한 듯 그런 그림이 왔고, 내외에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할 만한 잘못은 아니지만, 나는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한탄을 했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