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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수술식 구조조정 필요… 정부가 직접 메스 들어라”

입력 | 2016-04-22 03:00:00

[총선 이후! 이제는 경제다]경제전문가 10人의 산업 대개조 제언




“정부가 욕먹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환부는 과감히 도려내고, 실효성 있는 실업 대책으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정부가 부실기업 및 과잉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낼 준비를 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실효성 있고 과감한 정부의 대책 추진이 산업 대개조(大改造)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조언했다. 과거처럼 체질을 개선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일관했다가는 더 큰 화를 자초할 것이라는 게 한결같은 지적이다. 동아일보는 21일 전직 경제 수장 및 경제 전문가 10명을 인터뷰해 산업 대개조를 위한 제언을 들었다.

○ 정부 주도 외과 수술식 구조조정 필요

전문가들은 산업 대개조 수준의 구조조정을 민간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안정적인 경제 상황에서 부실기업 몇 개를 솎아낼 때는 주채권 은행이나 해당 기업에 구조조정을 맡길 수 있지만, 지금처럼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과감하게 구조조정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구 이해관계 등에 따라 구조조정에 난색을 보였던 정치권 못지않게 소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는 정부도 산업 구조 개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구조조정은 ‘시장 중심’이라는 형식에 너무 얽매여 있다”며 “민간이 제대로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국책 금융기관이 구조 개혁의 틀을 짜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강압적으로 추진했던 ‘빅딜’까진 아니더라도, 시장 논리에 따라 부채 비율이나 영업이익 창출 능력이 일정 수준 이하인 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칼을 들이대는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도 “구조조정 시행은 시장에 맡기되 방향성은 정부가 설정해 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정부가 구조조정의 원칙을 확립했다면 이후에는 신속하고 과감한 외과 수술식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옛 산업자원부 장관)은 “썩은 것은 잘라내고 안 되는 것은 과감히 버리는 외과 수술식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외과 수술식 구조조정의 성패는 결국 정부가 얼마나 ‘옥석 가리기’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잉 업종의 설비를 얼마나 줄이고, 부실기업의 채무 조정 및 인수합병(M&A)을 어떻게 할지 의사결정을 하려면 결국 부실 및 과잉 업종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쓰러져 가는 기업은 빨리 쓰러뜨려야 한다는 식으로 구조조정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구조조정의 대상과 시점을 잘못 결정해 살 수 있는 기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조언했다.

○ 손실 분담 원칙 명확히 세워야

5일 조선 기자재 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물량이 없어 가동을 멈춘 선박의장품 제조업체 공장 앞에는 ‘공장 매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영암=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구조조정 대상 산업의 부실은 어느 한쪽에 모든 책임을 씌울 수 없다. 방만한 경영을 한 경영진, 밥그릇 지키기에 나선 노동자, 부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금융권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신속하고 합리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결국 금융권-경영진-노동자 3자가 어떻게 손실을 부담하고 희생을 각오할지에 대한 큰 틀의 용단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외환위기 때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구조조정에 직면한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파업을 벌이고 기업 부실이 과도하게 금융권으로 전이되는 등의 부작용과 갈등을 빚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금융권과 회사, 근로자가 서로 얼마나 손실을 부담할지 원칙을 정해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실 부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를 설득할 수 있고, 경영권을 내놓는 수준의 대주주의 결단과 채권단의 희생도 빠르게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가 인력 감축이라는 과감한 결단에 동의한다면, 정부는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들을 위해 과감한 실업 대책을 마련해 이들이 겪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산업 대개조가 결국 한국 경제의 중장기 성장 잠재력 확보를 위해 추진되는 만큼, 축소 지향적인 몸집 줄이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좀비 기업에 돌아갈 자금이 신성장 동력과 신산업 분야에 제대로 투입될 수 있도록 과감한 투자 지원책을 수립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도 경쟁력 있는 산업 몇 개만 남기고 과감히 구조조정을 했다”며 “신산업 육성에 활용돼야 할 재원이 노후 공장을 수리하는 데 투입되지 않도록 차별화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  KDI가 분석한 구조조정 효과

경남기업은 2013년 유동성 위기가 왔을 때 추가 대출이 어려운 한계기업이었다. 하지만 전방위적인 정치권 로비를 통해 당시 시중은행 3곳에서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순간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기업 체질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고, 경영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결국 성완종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경남기업은 지난해 4월 상장 폐지됐다. 경남기업 대출 건으로 곤욕을 치른 시중은행들이 건설사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줄여 건실한 업체들도 자금난에 허덕이는 실정이다. 시공능력평가 상위 10대 기업 중 올해 상반기(1∼6월)에 신입사원 공채가 예정된 곳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듯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지연될 경우 해당 산업의 역동성을 떨어뜨려 정상 기업들조차 위기에 빠지는 부정적 파급효과가 발생한다. 21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값)이 1 미만으로 부실이 심화된 ‘좀비기업’이 자금을 지원받아 자산 비중이 10%포인트 올라가면 해당 산업에 속한 정상 기업의 고용 증가율 및 투자율은 평균적으로 각각 0.53%포인트, 0.18%포인트 하락했다. 제조업 분야 정상 기업들이 주로 투자를 줄였다면, 서비스 업종에선 고용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좀비기업을 과감히 정리하면 산업 전체가 경쟁력을 회복해 정상 기업의 고용이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좀비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할 경우 대규모 실업이 발생할 것이란 통념을 뒤집는 연구 결과다.

KDI에 따르면 좀비기업의 자산 비중을 10%포인트 줄이면 2014년 말 기준으로 정상 기업에서 11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부실기업 정리→산업경쟁력 회복→정상 기업의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로 구조조정 2∼3년 후에는 해당 산업에서 감원 인력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얘기다. 예컨대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 퇴출돼 해당 시장에서 상품 가격이 올라가면 생산성이 높은 기업들은 그만큼 수익성이 좋아진다. 높은 수익을 올리고 투자를 늘리면 고용도 증가하고, 산업의 역동성도 좋아진다는 설명이다.

정대희 KDI 연구위원은 “좀비기업은 중장기적으로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불러온다”며 “조선·해운·건설 분야에 대한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세종=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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