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스펙’ 무색한 대기업 공채시즌
○ 스펙을 둘러싼 다른 시각
민간기업뿐 아니라 공공기관들은 2년여 전부터 무(無)스펙 전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LG그룹은 어학 성적 및 자격증, 수상 경력, 인턴 활동 등 스펙을 입력하는 난 자체를 없앴다. 여기에 더해 사진, 가족관계, 주소 등 기초 정보도 요구하지 않는다. SK그룹은 스펙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전형을 따로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도 2017년까지 모든 공공기관 신입 사원 공채에서 스펙 적는 난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직무수행능력 평가에 집중해 업무에 최적화된 인재를 뽑기 위해서다.
광고 로드중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 마련된 ‘스펙평가’ 게시판. 취업준비생들이 자신의 스펙을 구체적으로 올려놓으면 회원들은 학점 등 스펙에 따라 특정기업 취업 가능 여부를 판단해 댓글을 남긴다. 취업 관련 사이트 캡쳐
강원 지역 사립대 사회복지과에 다니는 이모 씨(25)는 “최근 10년 동안 우리 과에서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학벌 빼고 학점, 토익, 자격증, 화려한 인턴 경력 등 모두 갖춘 선배도 있었지만 결국 취직 못 한 것을 보면 학교 이름을 보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년째 대기업 건설 계열사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 중인 지방 국립대 출신 전모 씨(31)도 모자라는 스펙이 탈락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 씨는 “매년 기업들이 스펙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며 전형 과정에서 구직자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고 하지만 면접관은 이미 학력을 알고 있었다”며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은연중에 학력이 공개되면 여지없이 질문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불합격했다”고 하소연했다.
○ ‘우회적 드러내기’로 여전히 통용되는 스펙
스펙을 적시하지 않아도 전형 절차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만큼 무스펙 전형이 기업들의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대학생 이지한 씨(27)는 “요즘 명문대 출신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자기소개서에 최대한 자신의 스펙을 드러내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스터디까지 한다”며 “면접을 볼 때 서울대를 다니면 자신의 과거 행적에 ‘신림동’을 자주 넣거나 연세대면 ‘신촌’, 고려대면 ‘안암’을 자주 넣어 그곳에서 활동했다는 등 경험을 최대한 녹이는 수법”이라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들의 의심이 터무니없지 않다는 증언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최근 시스템상으로 구직자의 스펙을 볼 수 없어지면서 오히려 면접을 통해 지원자의 스펙을 파악하는 데 열중하는 경우가 있다”며 “특히 지원자가 과거의 실패를 어떻게 현명하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답변을 통해 자연스럽게 스펙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면접관이 많다”고 귀띔했다.
광고 로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