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 주연 ‘남과 여’
상민(오른쪽)과 기홍이 교감하는 공간은 핀란드의 설원, 부산행 KTX, 그리고 어딘가의 바닷가다. 어디론가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었던 둘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매번 현실로 끌려 나온다. 앤드크레딧 제공
첫 영화 주연작인 ‘접속’(1997년)은 PC통신의 등장으로 빚어진 사이버 연애의 새로운 양상을 그렸다. ‘약속’(1998년)은 당시 유행이었던 최루성 멜로에 ‘조폭 코드’를 결합했다. 외환위기 직후 사회상이 응축된 ‘해피엔드’(1999년)도 있다.
사극 멜로인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 에이즈에 걸린 다방 종업원으로 나온 ‘너는 내 운명’(2005년), 2007년 금융위기를 반영한 듯 돈이 없는 백수 남자와 백수 여자가 등장하는 ‘멋진 하루’(2008년)까지 모두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유행을 이끄는 영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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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개봉한 영화 ‘남과 여’는 그가 오랜만에 도전하는 정통 멜로다. 액션이나 누아르, 무협 등 장르영화에 출연하며 멜로와는 거리를 두던 그가, ‘멋진 하루’의 이윤기 감독과 다시 함께 작업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그가 맡은 역할인 상민은 핀란드로 와 자폐아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낸다. 그곳에서 상민은 역시 우울증을 앓는 딸을 키우는 기홍(공유)을 만난다. 캠프를 떠난 아이들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폭설로 고립된 둘은 사랑에 빠진다. 꽁꽁 언 호수와 빽빽한 침엽수림,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 그리고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핀란드식 사우나에서.
영화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빡빡한 현실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상민의 남편은 신경정신과 전문의지만 정작 아이를 돌보며 일까지 하느라 옥죄어진 아내의 마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 기홍은 딸과의 관계가 소원할뿐더러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내까지 책임지느라 지친 상태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는 21세기 한국다운 설정이다. 불륜이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간통죄 폐지라는 사회 이슈를 선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뿐이다. 전도연이 연기하는 불륜이라는 점에서 ‘남과 여’는 언뜻 ‘해피엔드’와 쌍을 이루는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물의 민낯과 현실의 지질함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해피엔드’와 달리 ‘남과 여’는 끊임없이 뒤로 물러난다. 생계에 별 걱정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은 핀란드와 부산, 그리고 어딘가의 바닷가에서 벌어진다. 현실과 유리된 환상적인 공간에서 그들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은 아이뿐이다. 감정이입하기보다는 관람하게 되는 사랑, 지극히 장르의 관습에 충실한 멜로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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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은 늘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와 연기했다. 그들을 보면 그 시대 한국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자가 보인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