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정치부 차장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1979년 7월 콜로라도 주 샤이엔 기지의 북미방공사령부(이후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로 명칭 변경)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미국이 소련의 미사일을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핵무기로 상대방을 절멸시킨다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상호확증파괴(MAD) 핵전략에 거부감을 갖고 핵무기 폐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1981년 3월 워싱턴 힐턴호텔 앞에서 존 힝클리의 총격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뒤에 이런 결심을 굳혔다고 회고록에 썼다.
냉전시대의 맞수인 이들은 누구보다도 핵전쟁의 위험을 잘 알고 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1985년 11월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마무리하고 핵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핵무기 폐기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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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는 현인들의 이상과 기대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것 같다. 핵탄두의 수는 당시의 3분의 2 정도로 줄었지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은 ‘핵 없는 세상’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의 핵 개발 야욕이 가세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핵 위기는 오히려 냉전 때보다 훨씬 높아진 상태다.
핵무기 개발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두고 미국의 총기 규제와 유사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결국 나쁜 놈들만 무장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안보리 제재가 나오고 각국의 독자적인 제재가 강화되겠지만 남북 핵 불균형 속에서 북한이 핵 포기를 결심하게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핵무장론 거론의 배경이 된 셈이다.
하지만 국제무대를 향해 우리가 핵무장을 요구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핵무장론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있지만 지나치면 관심을 끌 수도 있다. 2004년에 불거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0.2g 분리실험을 두고도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에 직면했던 과거도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남북이 핵무장으로 맞서는 상황이 ‘공포의 균형’을 만들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조지 테닛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냉전의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우리는 소련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에 의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집무실에 거위 조각상을 설치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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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