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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

입력 | 2016-02-20 03:00:00

[국가대표 은퇴 그 이후]




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안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렇듯이, 몸에 인생이 새겨져 있다. 전 유도 국가대표 최천 씨(31)의 허리에는 두 차례 받은 디스크 수술 자국이 있다. 하나는 내시경이, 다른 하나는 메스가 남긴 것이다. 두 무릎에도 살을 찢었다 꿰맨 흉터가 있다. 그곳을 통해 연골의 절반을 빼냈다. 당장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나이가 들면 고생을 할 것이라는 얘기를 의사에게 들었다.

한때 수술의 흔적을 ‘영광의 상처’라고 여긴 적이 있다. 누가 더 큰 수술을 받았는지를 동료들과 비교하며 자랑하듯 얘기하기도 했다. 길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었다.

최천 씨가 한때 ‘영광의 상처’라고 여겼던 무릎 수술 자국. 최천 씨 제공



▼ 메달은 장롱 속에… 어린이집 심부름-막노동으로 생계 ▼

“얘들아. 이리로….”

키 181cm, 몸무게 110kg. 한눈에 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최 씨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표정이 어색하다.


전 유도 국가대표 최천 씨(오른쪽)가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원생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있다. 최 씨는 요즘 고모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운전사로 일한다. 운전사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맡게 됐다. 최 씨는 직전까지 건설현장 등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인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승합차에 아이들을 태우는 손이 솥뚜껑처럼 크고 억세다. 작은 아이의 머리는 가리고 남는다. 상대의 도복 깃을 자물쇠로 잠그듯 움켜쥐었던 손이다. 그 손에 제대로 걸리면 상대는 매트에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이윽고 최 씨가 운전석에 앉았다. 인천에 있는 한 어린이집에서 일과를 마친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에게 데려다주는 게 요즘 그의 일이다. 오전에 3번, 오후에 3번 핸들을 잡는다.

한 번 움직일 때 걸리는 시간은 15분 남짓. 운전을 하지 않을 때는 어린이집 원장인 고모 최은숙 씨(53)를 돕는다. 그래봤자 은행을 다녀오거나 생수통을 갈아주는 단순한 일이다. 1월 중순 어린이집 운전사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자 고모는 조카에게 연락을 했다. 함께 살지 않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고모였다. 추운 날씨 탓에 일감을 못 구해 집에서 놀고 있던 참이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힘이 좋고 소질도 있네. 열심히 해 봐. 커서 올림픽에 나가 봐야지.”

동네 유도체육관 관장님의 말 한마디가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가슴을 뛰게 했다. 취미 삼아 유도를 시작했지만 취미로만 그치기에는 재능이 뛰어났다. 부천 부일중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엘리트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훈련. 눈만 뜨면 매트에서 뒹굴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할 수도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잠을 원했다. 책가방 없이 학교에 가기 일쑤였다. 유도 명문 비봉고를 거쳐 ‘엘리트 체육의 요람’이라는 한국체대에 진학했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2004년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에 참가했을 때의 최천 씨. 그는 “당시에는 정말 무서운 게 없었다. 미래도 활짝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천 씨 제공

대학 1학년 때인 200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 90kg급에서 은메달을 땄다. 당시 한국은 남녀 각 7체급에 14명이 출전해 금, 은, 동메달을
하나씩 얻었다. 최 씨는 결승에서 지도 2개를 받아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주목을 받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한국 유도 중량급의 미래’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 금메달의 주인공은 73kg급에 출전했던 김재범(31·한국마사회)이었다. 김재범은 8년 뒤 열린 런던 올림픽 81kg급에서 우승했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의 메달은 올림픽 출전의 보증수표였다.


운은 없었다.

또래에서 최고였지만 올림픽 메달보다 더 어렵다는 국내 선발전에서 번번이 선배 황희태(38)에게 밀렸다. 국가대표 1진이 출전하는 아시아경기나 올림픽에는 늘 황희태가 나갔다. 황희태는 지난해 11년 만에 부활한 ‘경찰공무원 무도인 특별채용’에 응시했다. 2006년 도하, 2010년 광저우 등 아시아경기 2연패를 달성했던 한국 유도 중량급의 간판스타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 9.8 대 1의 경쟁을 뚫고 순경이 됐다. 합격자 명단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1위 임수정, 유도 2위 정경미 등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있었다. ‘경찰공무원 무도인 특별채용’은 같은 국가대표 출신이라도 아시아경기 메달도 없는 최 씨가 넘볼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종목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야 한다. 2015년 대한체육회 등록선수는 13만1305명(초중고교생 포함).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가대표는 1486명이다. 올림픽에 나가려면 국가대표끼리 경쟁해야 한다. 대한체육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2년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는 248명,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은 71명이다.

최 씨는 황희태를 피하기 위해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체급을 100kg급으로 올렸다.
‘모든 선수가 국가대표’라는 실업팀 한국마사회에 입단해 2008 KRA컵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했다. 지상파 TV가 전국에 생중계를 한 대회였다. 최 씨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최 씨는 “그 맛에 국가대표 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날 그의 휴대전화는 밤늦게까지 울려댔다. 최 씨의 우승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아버지는 2년 전 눈을 감았다. 아들이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끝내 보지 못했다.

최 씨는 대학 4학년 때 체육교사 자격증을 땄다. 마사회에 있던 2010년에는 경기대 스포츠과학대학원 석사 과정을 통과했다. 교사 자격증, 국제대회 우승, 석사 학위…. 자부심을 느꼈다.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의 삶이 그쯤에서 멈췄다면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되는 법이다.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 메달이 없기에 군 복무를 해야 했다. 국군체육부대에서 오라고 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유도를 계속하며 다시 올림픽에 도전할 수 있었다.


고민을 거듭했다. 3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을 할 자신은 있었다. 그래도 올림픽에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하루라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사회복무요원을 선택했다. 자신감이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체육부대에 갔다면 ‘아직까지는’ 생계 걱정 없이 유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2012년 3월 군 복무를 마쳤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대기업을 기웃거렸다. 체육 전공자를 뽑는 곳은 없었다. 토익 점수도 없는 그가 지원할 곳이 아니었다. 무도 유단자가 많다는 경호업체를 알아봤다. 격투기 유단자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주야 교대 근무를 하면서 손에 쥐는 월급은 150만 원 안팎. 어렵게 쌓은 경력과 학력이 아까웠다.

머뭇거리는 동안 시간만 흘렀다. 나이를 먹을수록 취업이 더 멀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경호업체보다 벌이가 좋다는 중소기업의 공장 문을 두드렸다. “석사 출신이 여길 왜 옵니까. 우리는 공고 출신의 젊은 사람을 원해요.” “유도 국가대표면 힘이 좋겠네. 그런 일을
찾아보세요.” 공장 관계자들의 말에 최 씨는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이 착각 속에 살아 왔다는 것을.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매트 위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사회는 냉혹한 벌판이었다.

해마다 1만 명 가까운 선수들이 은퇴한다. 대한체육회는 2015년 은퇴한 선수 가운데 국가대표 출신 128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했다. 20∼29세가 44.5%(57명), 30∼39세가 50.8%(65명)였다. ‘국가대표의 정년’은 20, 30대다.


27세에 은퇴한 최 씨는 1년 가까이 놀다 집 근처 청소년수련관에서 트레이너 일을 시작했다. 월급은 150만 원 안팎. 석사 학위도,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사실도 사회에 나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글펐다. 만사 제치고 뒷바라지해 온 가족들 볼 낯도 없었다. 힘들게 운동해서 남은 것은 골병든 몸뿐이었다. 공고나 상고를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도 했다.


2014년 4월 수련관을 그만두고 친구의 소개로 장애인 양궁 대표팀의 트레이너를 맡았다. 장애인아시아경기가 열리는 10월까지만 일하는 계약직이었다. 대표팀 코치였던 정영주 대구도시철도공사 감독(46)은 “국가대표 출신이라기에 놀랐다. 말이 트레이너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자리였다. 웨이트 트레이닝 지도, 화살 수거, 표적지 교체는 물론이고 휠체어 선수들이 차에 탈 때 업고 안는 일도 최 씨가 다 해야 했다. 고된 일을 하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성격이 좋아 선수들과도 잘 지냈다”고 기억했다.


장애인아시아경기가 끝나고 실업자가 된 그에게 그해 11월 대한삼보연맹에서 연락이 왔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창설한 푸껫아시안비치게임에 출전해 달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좋아하는 러시아 전통 무술 삼보는 유도와 비슷하다. 최 씨는 100kg급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 한국의 첫 금메달.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국위 선양’이라고 썼던 최 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백수가 됐다.

틈만 나면 구직 사이트를 찾아 헤맸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을 주는 곳은 없었다. 두 달 정도 방황을 하다 보험회사에 입사했다. 돈은 이전 직장보다 많이 벌었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다. 잠꼬대로 괴로워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아내가 먼저 그만두라고 했다.


2015년 7월 최 씨는 다시 실업자가 됐다. 그 뒤로는 ‘노가다’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기가 좋지 않아 1주일에 사흘만 일해도 감지덕지였다. 여전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응답은 없다. 요즘은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고모를 도우며 겨울을 나고 있다. 아내와 3월에 돌을 맞는 아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그에게 물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본인이 아니었느냐, 자신의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죠. 그래서 요즘은 운동하는 후배들 만날 때마다 지금부터라도 공부해라, 자격증을 따 두라고 얘기합니다. 시험 볼 때 답안지에 3번만 찍은 저처럼 운동 그만두고 후회하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서운한 마음도 있어요. 우리 사회가 운동선수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올림픽 메달 아닌가요. 이루지는 못했어도 그걸 위해 모든 걸 바쳤습니다. 운동 말고 다른 일에 눈을 돌리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죄를 짓는 것 같았거든요. 선진국처럼 학업과 운동, 직업과 운동을 병행하게 했다면 한국이 지금처럼 올림픽 메달을 많이 딸 수 있었을까요. 아마 비인기 종목은출전할 선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연금도 받고 지도자 등으로 활동할 기회가 많지만 저 같은 사람은 은퇴하면 갈 곳이 없더라고요. 지금도 전문직이 아니라면 뭐든 잘할 자신이 있는데…. 국가대표 타이틀이 인생의 멍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최 씨는 청소년수련관 트레이너로 일하던 2013년 10월 포장을 받았다. “귀하는 체육활동을 통하여 국위 선양과 국가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다음 포장을 수여합니다.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포장증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했다. 눈을 감아도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된다. 최 씨는 지금 마음마저 닫고 싶은 심정이다. 카카오톡 대문글을 ‘긍정 액션’이라고 쓴 것도 닫히는 마음을 억지로라도 붙잡기 위해서다.


지난해 6월 강원 춘천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 금메달, 1991, 1992년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3관왕,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던 김병찬(당시 46세)이었다. 한때 ‘역도 영웅’으로 불렸던 김병찬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뒤 월 52만5000원의 메달리스트 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다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2016년, 다시 올림픽의 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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