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전날, 임금께서 ‘왜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를 마련했는가? 미리 준비한 돼지고기를 모두 연회에 사용할 것인지?’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쇠고기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이번 칙사는 추운 계절에 왔으므로 생선도 구하기가 힘듭니다. 연회가 많으니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일이 잦습니다. 혹시 준비한 돼지고기 두 근이 부족할까 하여 쇠고기를 한 근 더 준비했습니다. 혹시 돼지고기를 찾으면 돼지고기를 올리겠습니다.”
쇠고기 한 근. 임금의 대답이 궁색하다. “소를 쓸데없이 도살하는 일은 애석하다. 그리고 음식을 더 내놓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늘 하던 대로 하라.” 하라 할 수도, 하지 마라 할 수도 없는 참담한 심정이 엿보인다. “주긴 하되 많이 주지는 말고, 원래 주던 대로 내놓으라”는 애매한 태도다.
제사에서도 돼지고기는 천시했다. 중국에서도 돼지고기는 천대받는 제사 음식이었다. “흉년이 들면 제사 음식에 하생(下牲)을 쓴다”고 했다. ‘하생’은 제사 음식의 등급을 낮추는 것이다. “소, 양, 돼지 대신 양과 돼지를, 양, 돼지 대신 송아지를 쓴다. 평소 송아지를 쓰던 이는 새끼돼지를 쓴다”고 했다. 숙종 12년(1686년) 11월 궁중에 올라온 상소문이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다. ‘하생’이다. 돼지는 늘 제일 뒤차지다.
우리도 돼지고기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에서도 돼지, 양 등을 먹지만 귀하다. 왕이나 귀족들만 먹는다. 고기 도축하는 것도 서투르다”고 했다.
고려 말기에도 여전히 농경의 주요 도구인 소는 귀하다. 문제는 종묘사직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다. 사신이 왕래하는 평안도 일대는 늘 고기가 필요하다. 고기를 구하기 위해 농번기에도 농민들을 사냥에 내몬다. 상소문은,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여 소의 도축을 엄금하고, 그 대신 양계장, 양돈장을 만들어서 고기를 공급하자고 주장한다. 양돈장은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세종 7년(1425년) 4월, 호조의 상소다. “전구서에 암퇘지 508마리가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으니 300마리만 남기고 나머지 200마리는 시세대로 팔아서 민가에서 두루 번식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세조 8년(1462년) 6월에도 돼지 사육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닭, 돼지, 개 기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손님 접대와 제사가 늘 넉넉하지 못하다. 한양 도성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수령이 직접 관리하라. 매년 그 숫자를 보고하고 양돈 성적에 따라 상벌을 적용하라”는 내용이다.
돼지고기는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안동 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도 돼지고기 요리법은 딸랑 두 개, ‘가제육(家저肉)’과 ‘야제육(野저肉)’뿐이다. 개고기 요리법은 10가지가 넘는다.
19세기부터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해진다. 순조가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할 때도 돼지고기는 등장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에도 “냉면과 돼지수육 값이 올라간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돼지고기가 흔해지고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