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한국이 싫어서’(장강명·민음사·2015년) 》
2012년의 봄밤 어느 건물 옥외 벤치에 남자 친구와 앉아 있었다. 내겐 일주일 전에 도착한 독일 A 대학원 최종 합격증이 있었다. 한참을 하늘만 보던 그가 말했다. “네가 진짜 가고 싶어 했던 B 대학원에 붙었다면, 그래서 거길 갈 수밖에 없다면 독일이든 뭐든 가라고 하겠어.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한국이 싫다고 도망가는 걸로밖에 안 보여.”
난 결국 유학 결정을 접었다. 똑똑한 그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한국식 경쟁 시스템에서 비교적 적응한 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대 초반의 나는 이곳에 숨 막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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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든 독일이든, 그곳도 또 다른 생존 현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나가 찾으려 했던 건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가 있는 곳이었다.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그런데 그게 전부야. (…)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라고 계나는 말한다.
성공을, 1등을, 목표 달성을 되뇌는 사회는 숨 가쁘다. 주변부에서 한계로 내몰리는 ‘흙수저(금수저에 대비되는 말)’는 돌아볼 틈도 없다. 이곳저곳 상처 난 사람들은 더욱더 가시를 세운다. 계나는 성공 신화가 사라진 오늘의 한국에 태어난 존재다. ‘우린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고 한국의 다음 세대는 묻기 시작한 것이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