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9호/경제] 기술 입도선매하는 애플, 美 정부도 적극 지원…‘물질 디자인’이 ICT 판도 바꿀 것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 등장하는 액체금속 로봇 T-1000.
이르면 3년 뒤 현실화될 듯
기존 합금은 냉각하면 물질 본래의 모습인 결정질 원자구조로 돌아가지만, 액체금속은 고체 상태에서 비결정질 원자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에 취약 부분이나 결점을 만들지 않는다. 그 덕에 탄성과 강도가 매우 높고 일반 금속과 달리 부식도 전혀 없다. 고온에서는 플라스틱처럼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데다 강도에 비해 매우 얇은 두께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상상해보자. 요즘 각광받는 3D(3차원) 프린터에 이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면? 설계도만 입력하면 원하는 모든 금속부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해진다. 액체금속이 차세대 물질로 떠오르는 이유다.
액체금속에 대한 특허를 가진 인물은 리퀴드메탈테크놀러지의 애터컨 페커 박사다. 2002년 미국특허청에 출원, 2004년 8월 등록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특허의 탁월함과 잠재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2010년 이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리퀴드메탈테크놀러지로부터 따낸 회사는 따로 있다. 바로 애플이다. 애플은 이 물질을 3D 프린터로 찍어내 아이폰 등 스마트기기에 사용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파우더 상태인 이 물질에 레이저 빔이나 전자빔으로 열을 가해 액체 상태로 만든 뒤 혁신적인 차세대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하면 이론적으로는 어떤 전자제품도 찍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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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운 기술은 애플이 2013년 등록한 3D 프린터 관련 특허다. 3D 프린터 위에 액체금속 파우더를 올리는 방법, 레이저, 전자빔, 적외선 등을 이용해 열을 가하는 방식, 물이나 가스로 냉각하는 방법, 인쇄기와 구축물 등을 이동하는 방법, 레이저로 층을 잘라내고 잘라낸 층들을 쌓는 방법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올해는 액체금속을 3D 프린터에서 사출하는 방법과 용해된 액체금속으로 원하는 구조물을 적층하는 방법에 관한 특허까지 등록했다. 한마디로 실용화를 위한 기술적 경로 대부분이 이미 애플에 의해 특허 출원된 셈. 이렇게 보면 애플은 향후 액체금속을 이용해 아이폰의 베젤이나 밴드를 3D 프린터로 찍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플은 이미 2013년 3D 프린팅 기법으로 액체금속을 이용해 스마트기기의 밴드나 하우징을 찍어내는 특허를 유럽특허청에 등록한 바 있다.
그간 애플은 자신들의 제품에 다양한 재질을 사용해왔다. 아이폰의 경우 2007년 처음 등장한 1세대부터 2009년 3세대까지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다 2010년 아이폰4부터는 세계 최초로 메탈을 적용했다. 이제는 차세대 물질인 액체금속을 확보해 디자인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셈이다. 애플이 이를 위해 액체금속과 3D 프린팅에 투자한 금액만 5억 달러(약 5800억 원)에 이른다.
이제는 ‘물질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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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지금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핵심 역량은 바로 물질 혹은 소재 디자인이라는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금속이 대세지만 조만간 액체금속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고체와 액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액체금속에 3D 프린팅 기술이 가세하면 이는 말 그대로 위대한 융합의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인쇄공정 혁신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온 것은 프린터라는 디바이스가 아니라, 잉크의 변화였다. 마찬가지로 3D 프린팅에서 제일 중요한 것도 물질(플라스틱, 금속, 액체금속, 세라믹 등)을 확보하는 일이다. 우리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 역시 새로운 소재와 물질을 찾고 확보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제품 전체를 3D 프린팅 기술로 찍어낸다는 식의 단순한 관점 대신, 제품에 들어가는 몇 가지 부품을 찍어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제조 방식의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양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액체금속의 무한한 가능성만큼이나 혁신적인 접근법과 사고방식이 절실하다.
차원용 아스팩미래기술경영연구소 소장 wycha@nuri.net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10.21.~10.27|1008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