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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보수 힘들어진다” 건물주 난색에 미래유산서 빠진 ‘윤보선 감시 건물’

입력 | 2015-10-0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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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감시 건물’로 알려진 출판사 ‘명문당’ 사옥(위 사진)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 ‘대오서점’의 전경.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수십 년의 세월이 내려앉은 회백색 외벽은 제 빛깔을 잃었다. 외벽 곳곳은 비바람에 칠이 벗겨져 잿빛 시멘트를 드러냈고 그나마 칠을 유지한 나머지 부분은 녹물과 얼룩으로 덮여 있었다. 건물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좁아지는 데다 사다리 형태의 옥외 계단이 있어 마치 요새나 망루 같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오르게 했다.

이곳은 사적 제438호인 윤보선 가옥과 약 5m 너비의 길을 사이에 둔 출판사 ‘명문당’의 사옥. 서울 종로구에 있는 낡은 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의 다른 이름은 ‘윤보선 감시 건물’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 때 윤보선 전 대통령의 가옥을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세운 것으로 알려지면서 붙여진 별칭이다. 명문당은 1970년 이 건물을 매입해 입주했다.

○ 서울시 “명문당 사옥은 윤보선 감시 건물”

8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2012년부터 명문당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서울시는 “근현대사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건물”이라며 미래유산 추진 이유를 밝혔다. 이를 위해 ‘윤보선 감시 건물’의 근거를 찾아 나섰다.

초기에는 쉽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유족을 만나 면담을 시도했지만 “그 건물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만 들었다. 서울시는 2012년 10월부터 약 1년간 역사학자들의 고증과 전 중앙정보부 직원의 언론 인터뷰 등을 참고해 해당 건물이 윤보선 감시 건물로 사용됐다고 결론 내렸다.

미래유산 심의에 참여한 서해성 성공회대 교수는 “윤 전 대통령 집 건너편의 건물은 감시초소이며 역사유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서울시에 전했다.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을 지낸 고 방준모 씨가 약 20년 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67년 대선 당시 윤보선 가옥 앞 덕성여고 2층에 저격수를 대기시켰다”고 증언한 것도 참고가 됐다. 명문당 측은 당초 2012년 말 서울시와의 면담에서 “윤보선 감시 건물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 초 최종 발표된 미래유산 350개 가운데 명문당 사옥은 빠졌다. 명문당 측이 “건물 개·보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 “지원 없이 관리 책임만” vs “미래유산 재추진”

서울시에 따르면 미래유산으로 선정돼도 건물주에게 재정적 지원이나 보상은 없다. ‘서울시 미래유산’이라는 간판을 달아주는 게 전부다. 반면 건물주들 사이에선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면 사유지임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재개발 재건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명문당이 미래유산 지정을 반대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건물 소유자 측은 미래유산 지정과 함께 건물의 보수나 유지 지원 등을 원했지만 서울시는 건물의 보존 책임은 소유자 측에 있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인 ‘대오서점’은 올해 초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결국 지난달 서울시에 지정 취소를 신청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건물이 헐리기라도 하면 서울의 역사를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져버리는 셈”이라며 “건물 소유주들을 충분히 설득해 미래유산을 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